[한국의 의사]"환자외면 언제까지…" 딜레마

  • 입력 2000년 8월 29일 18시 28분


고시생인 전태훈(全泰勳·32)씨는 위암3기인 부친(64)을 모시고 수술을 할 병원을 찾아 헤매다가 의사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강원 속초에서 위암 판정을 받은 부친이 상경한 때는 7월10일. 서울 J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위장을 거의 다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와 8월7일로 수술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수술을 위해 재차 병원을 찾았을 때는 “전공의 파업으로 수술 일정이 무기연기됐다”는 냉담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결국 진료를 받지 못하고 위장약 처방전을 받았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전씨는 서울시내 종합병원을 샅샅이 뒤졌으나 새로운 수술환자를 받겠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친 말고도 수술이 미뤄진 환자가 많을 텐데 언제나 차례가 올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전씨는 환자 치료라는 본분을 방기한 의사들에게 어떤 국민이 호응하고 박수를 치겠느냐며 분을 삭였다.

응급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전공의 참의료봉사단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지킨다고 하지만 인력 부족과 외래환자 쇄도로 진료 공백은 심각하다.

포항에 사는 신모씨(52)는 최근 장인을 잃었다. 17일 갑자기 다리의 동맥이 막혀 기동을 못하는 장인을 모시고 포항 시내 병원 응급실을 돌아다녔으나 수술을 하겠다는 병원은 없었다. 다음날 대구까지 119구급차로 달려가 영남의료원 응급실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주부 이영숙(李寧淑·41·서울 구로구)씨도 응급실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소파에서 떨어져 어깨가 크게 부어오른 17개월된 딸을 안고 K병원 응급실로 뛰어갔으나 당직의사의 답변은 “단순 타박상이니 돌아가라”는 것. X레이라도 찍어달라고 2시간 이상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뒤늦게 동네 정형외과에 가서 X레이를 찍었더니 늑골이 부러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전공의 파업으로 인한 대형병원 마비가 한 달을 넘기면서 이제는 제발 환자를 생각해달라는 시민들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 ‘자기 부모가 위독한 상태라도 주장 관철을 위해 폐업을 할 것인가’(천리안 ID : leej03), ‘더 이상 파업해봐야 명분과 실리 모두 잃는다. 자존심과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파업을 끝내주길….’(천리안 ID : greatpower)

건강연대 최윤정(崔允貞)실장도 “동네병원 정상화와 상관없이 대형병원 마비는 중환자에게 치명적”이라며 “생명이라는 가치는 정부책임으로 미루거나 임의로 연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조속한 병원 정상화를 촉구했다.

종합병원의 의료공백은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은 말할 것도 없고 1, 2차 진료기관에서 종합병원으로 의뢰되는 외래환자도 때에 따라서는 목숨이 왔다갔다한다.의료공백으로 인한 환자의 불편은 의사들에게도 최대의 딜레마다.

연세대의대 홍영재(洪永宰)교수는 “환자 치료를 제대로 못하면서 투쟁해야 하는 현실이 가장 안타깝다”라며 “하지만 잘못된 의약분업을 ‘우선 시행부터 하자’는 정부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의 문제는 ‘우선 시행’이 적용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결국은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의사의 소신 진료를 확보하자는 투쟁이니만큼 다소간의 불편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홍교수를 비롯한 대다수 의사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개원의는 “그만 파업을 풀자는 의견을 가진 의사도 많지만 섣불리 주장하다가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들이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일찍이 잘못된 제도에 저항하지 못했고 지금도 파업중단의 ‘총대’를 메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개혁이라는 대명제를 내세웠지만 보이는 모습은 의사들의 이기적인 밥그릇 다툼이었다는 반성도 없지 않다.

조홍준(趙弘晙)울산대의대 교수는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정부의 재정확충을 촉구하는 주장은 옳지만 그것을 수가인상으로만 연계시켜 결국 의사들이 이기적이라는 비난밖에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민의 의료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필수적인 보험급여부문 확대 주장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 조교수는 “의약분업을 둘러싼 갈등 이전에 의료개혁을 먼저 부르짖었다면 국민도 의사들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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