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 2000]脫민족주의/활짝 열린 '잡종사회'

입력 2000-02-20 20:02수정 2009-09-23 04:41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장학자인 임지현 한양대교수(서양사)가 지난해초 선보였던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 폐쇄적이고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적이며 권력화의 성향이 짙은 20세기 한국 민족주의를 비판한 내용이다. 이른바 ‘탈(脫)민족주의’.

책이 출간됐을 때 한바탕 소나기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신성불가침한 민족주의를 감히 반역으로 몰아 세우다니” “서양사학자가 뭘 안다고 한국 민족주의 비판 운운하는가” “애들 버려놓고 있구먼” 등등.

비판에도 불구하고 탈민족주의는 소장학자들과 젊은층을 중심으로 적잖은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에 탈민족주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양성을 중시하는 탈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 세계화 조류 등에 힘입어 더욱 확산되고 있다.

▽20세기 한국의 민족주의〓탈민족주의의 비판 대상인 한국의 민족주의는 불행했던 근현대사와 밀접하다. 식민시대, 분단의 고착화와 군사독재 등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이 민족주의를 권력화 신화화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식민시대, 민족은 국가의 공백을 채워주는 절대적 신화였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은 개인의 실존 차원을 넘어선다. 민족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이념이었다.”

민족주의는 광복 후 남과 북에 의해 모두 권력의 도구로 변했다고 임교수는 지적한다.

“10월유신과 주체사상이 그렇고 새마을운동과 천리마운동이 그렇다. 민족은 어떤 무엇보다 우선시되었고 독재권력과 결탁했다.”

▽왜 탈민족주의인가〓한 개인의 정체성은 어떤 민족인가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성별 국적 인종 직업 취미 등 다양한 층위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 각양각색의 관계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민족 하나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한다. 윤해동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한국사)은 “민족주의는 구성원 개인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또한 민족주의는 약한 민족에 대한 억압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 탈민족주의자들의 견해다.

▽페미니즘과 탈민족주의〓탈민족주의 논의에 있어 중요한 시각의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민족주의는 혈통을 강조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와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민족〓아버지’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말이다.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주립대 최정무 교수(동아시아학)는 “부권(父權)의 복구를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는 여성을 더욱 억압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20세기 한국의 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비판한다.

일본의 우에노 치즈코 도쿄대교수(인류학)도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국가와 민족의 틀을 넘어설 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한국, 세계화, 탈민족주의〓현재 한국 사회는 탈민족주의와 민족주의가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임교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탈민족주의의 극단, 김지하의 율려운동 같은 경우는 민족주의의 극단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탈민족주의 논의는 민족주의의 해체 과정이다. 그러나 해체만하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임교수는 “종족 중심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물론이고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 중국 조선족, 나아가 해외의 다른 민족 등 그동안 배제했던 다양한 계층과 이민족(異民族)의 다층적인 정체성까지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려 있는 ‘잡종사회(Hybrid Society)’, 권력이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 민족주의’가 탈민족주의의 목표다.

그러기 위해선 초국가적인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임교수는 일본 탈민족주의자들과 한일 공동 역사교과서 서술 작업을 추진 중이다. 자국 중심의 역사를 극복하는 것이 탈민족주의의 핵심이라는 판단에서다. 국내의 탈민족주의 연구자는 아직 손꼽을 정도. 그러나 임교수는 탈민족주의를 ‘위닝 마이너리티(Winning Minority)’, 미래를 선도할 소수라고 본다.

▼키워드: 잡종사회▼

잡종사회(Hybrid Society)는 잡종, 잡종의식, 잡종문화가 살아 숨쉬는 다양성의 사회다.

잡종은 원래 생물학적 개념이었다. 생물학에 따르면, 동종교배(순종)는 질의 저하를 가져오고 이종교배(잡종)는 강하다. 이 개념이 사회문화 분야에 적용된 것은 탈(脫)중심 다양성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 잡종의식은 배타적인 편가르기를 거부하고 공생을 도모한다. 요즘 얘기되는 탈장르, 퓨전, 크로스오버(crossover),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 등이 모두 잡종문화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