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이끈 潮流]철학/'인간 이성' 믿음에서 반성으로

  • 입력 1999년 12월 13일 19시 56분


《보름 남짓 남은 20세기. ‘실용의 세기’이기도 했던 이 시대는 순수 학문적 탐구에서도 진전과 변화가 있었다. 20세기 학문의 큰 흐름과 그 것이 인류문명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각계 전문가들이 20세기 인문사회과학이 걸어온 길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20세기는 인간이 ‘이성’이라는 특출한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다가 그 한계를 깨닫고 반성에 이른 시대다. ‘이성’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대신한 인간의 ‘권능’이었다.

20세기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기존의 모든 가치질서를 전복시키며 인간이 의지를 가진 ‘입법자’임을 주장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죽음(1900)과 함께, 철인들의 시선을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부터 현상(現象)쪽으로 돌려놓은 에드문트 후설의 ‘논리연구’ 발표(1900∼1901)와 함께 시작됐다.

20세기 중반까지의 철학계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이 큰 줄기를 형성했다. 후반에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가 다양한 형식으로 이 모두를 포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이론이 또 다른 줄기를 형성했다. 한편 동양에서는 서구철학의 유입 속에 전통철학의 비판과 계승 문제가 논란이 됐다.

▼현상학과 실존철학▼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거장들로 대표되는 현상학은 드러나는 현상을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이자는 정신에서 출발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실존철학에도 그대로 이어져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한 주체의 능동성을 적극 강조하게 된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파괴한 1차대전을 경험한 후설은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대신 단지 수단화돼 버린 학문에서 이 비극의 원인을 찾았다. 현상학은 기존의 모든 이론 체계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유보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모든 이론과 선입견을 정지시키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현상을 그 자체로 다시 탐구한다. 설령 현상 그대로의 삶이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어떤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전제를 받아들여서는 진정한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현상학은 이렇게 생생한 현실로 펼쳐지는 현상 세계의 선행조건으로서 의식의 선험적 활동 내지 선험적 주체에 주목한다. 유럽의 피폐한 현실을 바라보며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또는 신학적 전제에 앞서는가를 밝힌 것이다.

▼비판 이론▼

20∼30년대 유럽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랐다.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먼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데 반해 선진유럽에서는 1차대전 직후 좌익 노동계급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소련체제는 스탈린주의의 지배하에 관료적 사회로 나갔고 오히려 자본주의는 파시즘과 나치즘 및 노동계급에 대처할 능력을 보여 줬다.에리히 프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테오도르 아도르노,위르겐 하버마스 등 비판 이론가들은 헤겔, 프로이트, 베버 등의 사회 현실에 대한 개별 과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을 보완하고 정정하고자 했다. ‘비판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옹호했다. 비판이론에서 ‘사실’은 이론에 의해 또는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산물이며 사실을 지각하는 ‘기관’ 역시 역사적 산물이다. 또한 비판이론의 목표는 지식 자제의 증가보다는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사회, 이성적인 사회를 조직화하고 모든 개인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구조-포스트 구조주의▼

전후 프랑스를 대표하던 현상학,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구조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흡수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 미셸 푸코 등으로 대표되는 구조주의는 주체, 의미, 역사성 등을 내세우던 종래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거부한다. 종래의 이론이 인간, 사회, 문화에 대해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주체의 경험, 역사성, 의식, 자유 등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구조주의는 주체를 구조의 산물로 본다. 주체란 그로부터 독립된 구조에 의해서 고유한 자리와 의미가 부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런 문제틀을 공유하면서도 보편적 구조를 해체해 나가는 보다 급진적인 흐름이다.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장 보드리야르 등에서 보듯이 서구 역사에서 보편적 이성이 초래한 전체주의적 억압을 문제 삼으면서 보편적 이성 대신 이질성, 우연, 단절, 차이, 언어, 권력, 욕망, 기호의 자율적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분석 철학▼

20세기 영미철학의 주요 흐름 중 하나인 분석철학은 20세기 초에 버트런드 러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체계화되어 철학의 전통적인 개념을 뒤집으려 했다. 분석철학자들에 따르면 철학이란 일상인이나 일반 학문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분석이다. 이들은 어떠한 형이상학의 체계도 거부하며 새로운 분석 또는 논증과 주장이 출현할 가능성에 대해 대단이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명제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논리 법칙에 일치해야 하고 검증가능해야 한다. ‘물 자체가 존재한다’ ‘신은 죽었다’와 같은 명제는 아무리 애써도 검증할 도리가 없다. 즉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수가 없다. 형이상학에 속하는 이런 명제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무의미하다. 인간의 운명이니 자연의 목적이니 하는 따위는 무의미하므로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서문명의 충돌▼

서양철학의 20세기가 이성의 승리와 좌절의 역사였다면 동양철학의 20세기는 동서문명의 충돌과 동양정신의 좌절, 그리고 명예회복을 시도한 시기였다. 19세기 말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 동양은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등 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물질문명의 결합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의 속도와 규모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의 계승과 서구문화 수입에 대한 논쟁이 계속됐다.이러한 논쟁의 정점은 1982년에 시작되서 199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문화열(文化熱)’ 논쟁이었다. ‘문화열’이란 말 그대로 ‘문화연구 토론의 열기’을 말한다. 여기서 논의된 중심 주제는 문화의 정의와 성질, 중국문화와 외국문화 사이의 우열과 교류, 민족과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수용 문제 등이다.

▼문화열 논쟁▼

문화열은 거의 모든 학문 영역의 논자들이 참여하여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도출해 낸 논쟁이다. 제기된 주장들은 ‘철저재건론’ ‘비판계승론’ ‘유학부흥론’의 세 유파로 분류된다.

철저재건론자들은 시스템 전체를 서구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지만 중국 건국 이래 역사의 주역은 ‘비판계승론(批判繼承論)’이다. 이들은 중국민족의 주체의식에 뿌리를 두고 중국적 특성을 지닌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 신문화’를 건설하고자 한다.

가장 보수적인 ‘유학부흥론(儒學復興論)’은 전통유학의 부흥만이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홍콩 대만 미국 등지의 화교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유학부흥론은 사실상 두 가지 후원세력을 가지고 있다. 송대(宋代)성리학을 기반으로 서양철학을 수용한 ‘현대신유가(現代新儒家)’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자본주의’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도 크게는 이 범주에 속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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