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정진홍/「애매한 新聞문체」진실 가릴수도

  • 입력 1999년 4월 4일 19시 38분


어떤 일에 대한 신문의 보도 내용을 독자들은 대체로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비록 ‘신문의 기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고 전적으로 불신하는 것도 바보스러운 일’이라는 충고가 없지 않지만 신문기사의 그러한 역설적 현실을 언제나 의식하고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수밖에없다. 신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새 삶의 지평이 새로운 정보들로 인하여 넓어진다고 느끼지만 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독자는 신문을 읽으면서 거기 실린 보도내용의 울에 갇힌다. 따라서 그 보도내용 이외의 정보를 가지고 그 기사의 사실성 또는 진실성을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보도된 어떤 특정한 일을 자기가 직접 겪었다든가 아니면 여러 언론매체들이 그 일을 보도한 내용들을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전문적인 작업을 하지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독자들은 어차피 신문이 마련한 울 안에 수동적으로 갇힐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일어난 일은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일정한 틀을 통해 하나의 ‘신문적(新聞的) 사실’이 된다. 따라서 독자는 신문을 통해 실제 사실을 접하기 보다 다만 신문적 사실을 접하면서 그 사실을 실제 사실로 여기는 자리에 머문다. 그런데 신문이 이러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보도의 특정한 시각 때문이 아니라 많은 경우 보도 문장의 ‘다채로움’, 또는 거기 담긴 기사 작성자의 자의성 때문이다. 특히 하나의 문장을 닫는 결미(結尾)언어의 현란함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하나의 주제로 전해지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결미언어가 문장 또는 문단의 끝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방침이다, 계획이다, 예정이다’/‘밝혔다, 말했다, 주장했다, 지적했다’/‘분석들도 나오고 있다, 관측도 나오고 있다’/‘∼짐작되고 있다, 할는지도 모른다, ∼로 보인다, ∼할 전망이다, 예상된다’/‘확인됐다, 드러났다, 밝혀졌다, 알려졌다,∼라는 전언이다’/‘주문했다, 당부했다, 못박았다, 강조했다’/‘∼로 풀이된다, ∼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라고 경고했다’ 등. 위에서 사선으로 묶은 일군의 결미 언어들은 보도 기사 안에서 예사로 상호교체 가능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밝혔다’와 ‘주장했다’는 같은 개념적 함축을 지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미언어의 선택을 통해 기사 작성자는 결과적으로 사실을 보도하기보다 신문적 사실을 ‘창조’하는데 이르고, 독자는 이를테면 이미 구분된 ‘주장’과 ‘밝힘’을 좇아 원래 발언된 언급내용에 대한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실을 빚어낸다.

마침내 신문적 사실이 실제 사실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칫 우리로 하여금 허상에 빠지도록 할 수 있다.

물론 기사 작성자가 ‘밝힘’과 ‘주장’을 다만 결미언어의 운문적(韻文的) 효용을 위해서 교대로 사용했을 리는 없다. 그렇게 구분해서 묘사할 만큼 뚜렷한 판단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독자의 입장에서 불안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해석된 사실 뿐이라는 철학적 항변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너무 근원적이어서 때로 비현실적이다.

기사 문장의 결미언어가 사실을 오도할 수도 있고, 없던 사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있던 사실을 없앨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정진홍<서울대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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