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지켜라]<2>건축박물관 베네수엘라 항구도시 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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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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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의 옛 가옥은 대를 이어온 장인들이 ‘타피아’나 ‘바하레크’라고 부르는 이 지역만의 건축 방식 및 재료를 이용해 지은 문화유산이다.
코로의 옛 가옥은 대를 이어온 장인들이 ‘타피아’나 ‘바하레크’라고 부르는 이 지역만의 건축 방식 및 재료를 이용해 지은 문화유산이다.
《마을은 조용했다. 이글거리는 카리브 해의 태양 아래 거리는 한껏 늘어져 있었다. 숨 막히는 열기 속에 벽들도 더운 숨을 뿜어내는 듯했다. 서로 어깨를 마주 댄 주택들. 널찍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끝도 없이 늘어선 외벽에서는 간소한 장식조차 찾아볼 수 없다. 파랑과 빨강, 노랑의 강렬한 조화마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살짝 무뎌졌다. 도대체 무엇이 밋밋해 보이는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만들었을까.》

사유재산 탓에 멋대로 보수
새집 짓겠다며 부수기도…


베네수엘라 북쪽의 항구도시 코로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궁금증에 감질난 방문객이 답을 찾아가도록 한다. 안내팻말조차 찾기 어렵다. “여기서부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옛 가옥이 시작됩니다.” 베네수엘라 문화유산청(IPC) 소속 안내원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골 주택가다.

이 낙후된 도시는 태생부터 불운했다. 코로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만든 식민도시 중 하나다. 16세기 초 유럽의 정복자들에게 코로는 황금이 가득하다는 대륙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을 뿐이다. 해적들의 노략질은 도시의 번영을 가로막는 또 다른 걸림돌이었다.

코로의 건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독특한 건축 문화를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록달록한 동화나라 속 마을 모형 같은 외관에 묻어나는 이국적 분위기. 스페인에서 건너온 유럽 및 이슬람 무데하르 양식에 네덜란드령인 중남미 섬에서 건너온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 원주민의 건축 특징이 섞인 결과다. 더 큰 가치는 벽 속에 숨겨져 있다. 돌멩이와 말린 풀, 나무, 흙 등을 섞어서 쌓은 뒤 그 위에 다시 진흙을 이겨 바르는 이른바 ‘바하레크(bahareque)’와 ‘타피아(tapia)’ 방식이 바로 그것. 염소의 털까지 섞는 이 특별한 재료 혼합 방식은 코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의 미장이들만 기술을 독점해 전승해온 무형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천장이 높다란 어느 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의 테라스를 ‘ㅁ’자형으로 둘러싼 복도를 따라 화초와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복도의 타일, 천장 장식과 벽돌색 기와도 모두 건축 당시 그대로라고 했다. 테라스 앞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던 노부인이 비로소 돌아본다. “세계유산인 이 집에서 태어나 94년을 살았지요.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알리시아 플로레스 라모레스 할머니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베네수엘라 코로 시내에 위치한 성 프란시스코 성당. 군더더기 없이 간소한 디자인은 유럽과 이슬람 무데하르, 원주민의 건축양식이 섞여든 코로만의 특징이다.
베네수엘라 코로 시내에 위치한 성 프란시스코 성당. 군더더기 없이 간소한 디자인은 유럽과 이슬람 무데하르, 원주민의 건축양식이 섞여든 코로만의 특징이다.
해안가의 라벨라 항구를 벗어나 코로 시내 중심가로 가까워질수록 마을은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 큰 2층집이 나타났고 와인색 벽의 페인트 색깔도 한결 밝고 선명해졌다. 외부로 표출된 발코니가 특징인 ‘발코니의 집’, 창틀이 아름다운 ‘철제 창문의 집’, 첨탑이 높은 성 프란시스코 성당 등도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정부(情婦)를 다룬 영화 촬영장이었다는 옛 귀족의 집도 있었다.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다 보니 관리와 보존에 어려움이 많아 정부가 가옥을 사들이려 합니다.” 유네스코 베네수엘라 국가위원회의 비올레타 안토네티 씨가 설명했다.

과거의 유산 속에서 주민들은 현재를 살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속에서 코로 주민들이 여전히 ‘둘세레체’(염소젖과 설탕으로 만든 일종의 캐러멜)를 만들어 팔고 세탁소와 정육점 슈퍼마켓을 운영한다. 이는 유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힘이지만 동시에 보존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IPC 직원은 “거주민이 훼손된 곳을 마음대로 보수해도 사유재산이어서 이를 막을 마땅한 방법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구역이 넓고 가옥들이 분산돼 있어 실제 관리도 어렵다고 했다. 길가에는 새 집을 짓겠다며 집주인이 부순 폐가(廢家) 잔해도 눈에 띄었다.

기후변화의 여파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코로는 주거지 바로 옆에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는 건조 지역. 7년 연속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적도 있던 이곳에 언젠가부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대홍수로 주택 곳곳이 크게 훼손되면서 결국 유네스코 위험유산 리스트에 오르는 처지가 됐다. 헥터 토레스 IPC 청장은 “비가 익숙하지 않은 이곳은 배수 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 피해가 컸다”고 털어놨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햇살이 내리쬐는 중앙의 널찍한 테라스가 손님을 맞는다. 94세의 알리시아 플로레스 라모레스 할머니가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햇살이 내리쬐는 중앙의 널찍한 테라스가 손님을 맞는다. 94세의 알리시아 플로레스 라모레스 할머니가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유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것. 베네수엘라 정부의 부정부패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 관리는 점점 악화됐다. 금이 가고 헐어내린 벽, 깨진 기와와 타일은 방치됐다.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깊이 파인 황갈색 진흙 벽에 지푸라기가 노출된 곳도 많았다. 유네스코에 제출해야 할 관리 보고서도 최근 2년 연속 내지 못했다.

정부는 뒤늦게 대응에 나선 상태. 2005년 이후 지금까지 3억 볼리바르(약 443억 원)를 투자해 복구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IPC는 미래 보존계획을 수립해 대통령의 최종 사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지역에 사는 빈민에게는 교육과 생활비 지원 등에서 우선권을 준다. 집을 짓는 수작업을 무형문화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해온 장인들을 특별 관리한다. 18명의 장인이 인근에 모여 살면서 보수 작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후손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토레스 IPC 청장은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폭우에 대비하는 작업은 거의 완료됐다”고 설명했다.

어느새 하늘이 깜깜하다. 골목 끝의 한 허름한 간이식당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때서야 아레파(옥수수 반죽에 고기나 생선을 넣고 튀겨낸 베네수엘라 전통 음식)를 한 입씩 베어 먹으며 저녁 식사를 때우는 IPC와 유네스코 직원들. 하루 종일 코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도와준 이들의 발품은 유산복구 노력의 한 단면일 터이다. “코로를 반드시 유네스코 위험유산 리스트에서 빼내겠다”는 베네수엘라의 목표 달성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수엘라 2번째 세계유산 중앙대 카라카스 캠퍼스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종합대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건물 연결 통로에 설치된 예술작품 앞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토론을 벌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종합대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건물 연결 통로에 설치된 예술작품 앞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토론을 벌이고 있다.
캠퍼스 전체가 예술작품인 대학. 건축가 한 명이 캠퍼스 전체의 배치는 물론 문손잡이 하나까지 디자인한 대학. 천장과 건물 벽, 잔디밭, 강당 어디에서나 예술가의 그림이나 조각상을 하나쯤은 찾아볼 수 있는 곳. 베네수엘라의 중앙대 카라카스 캠퍼스다.

이 대학은 1970년대 베네수엘라 출신의 건축가인 카를로스 빌라누에바가 자신의 건축이념을 담아 디자인한 ‘작품’이다. 그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전 세계 28명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함께 10여 년간 대학 전체에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 대담한 작업을 추진했다. 이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넓은 공간에 건물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탓일까. 첫인상은 평범했다. 하지만 대학 구석구석을 다닐수록 세세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강당 천장을 장식한 알렉산더 칼더의 ‘떠다니는 구름’은 학생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 대학만의 특징. 도서관 로비의 벽 한쪽을 전부 메운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약대와 의대 앞에 놓인 조각상, 각 대학 건물의 벽을 장식한 형이상학적 무늬의 타일과 그림 앞에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책을 읽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2개밖에 없는 베네수엘라 내 유네스코 문화유산 중 하나”라는 대학 측의 자랑에도 불구하고 건물 곳곳에는 갈라진 틈과 벗겨진 페인트, 깨진 벽돌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빗물이 새는 곳도 있었다. 이 대학의 마리아 데브게니아 바치 홍보국장은 “복구 보존에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며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인) 유가가 하락해 대학 예산에도 직격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21세기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대학생들의 반발이 정부 예산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도 있다.

글·사진 코로·카라카스=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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