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 → 쌕쌕거림, 연하장애 → 삼킴장애… “아니까 덜 아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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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4>알 권리 막는 공공언어
의사도 헷갈리는 한자식 표현

“스트레스로 인해 심계항진 증상이 심해졌네요. 연하 장애도 있고…. 경추와 요추도 많이 긴장된 상태고요.”

얼마 전부터 몸이 자주 쑤시고 피로해 병원을 찾은 직장인 박영진(가명·36) 씨는 의사의 말을 듣자 눈앞이 캄캄했다. ‘심계항진? 연하 장애? 경추와 요추는 어느 부위였지….’ 낯선 용어들을 접하니 박 씨는 갑자기 큰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간단한 약 처방만 받고 진료는 곧 끝났지만 영 찜찜했다.

“스트레스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삼킴 장애가 왔다는 말이야. 경추는 목뼈. 요추는 허리뼈.” 의사인 친구에게 곧장 전화해 진단 결과를 얘기하자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박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 씨는 “별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 졸였다”며 “용어를 듣고 의미가 와 닿지 않으니 지레 겁먹게 되더라”고 말했다.

박 씨처럼 어려운 의학 용어 때문에 당혹해하는 환자들이 의외로 많다. 실제로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연구진이 16가지 질환에 대해 각각 어려운 의학 용어와 쉽게 풀어 쓴 용어를 실험 대상자들에게 알려준 결과 이들은 같은 증상이라도 낯선 전문 용어로 말하면 더 심각한 질환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같은 증상을 두고도 ‘만성 속 쓰림’이 아닌 ‘위식도역류병’으로 말할 때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식이다.

○ 의미 알기 힘든 의학 용어

의학 분야에서 쓰이는 전문 용어는 학술 언어이자 일종의 직업 언어다.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위원장을 지낸 황건 인하대 의대 성형외과 교수는 “환자들이 오해할 만한 의학 용어는 다듬을 필요가 있다”며 “의학 용어를 순화하는 작업은 의료 현장에서 더욱 정확한 소통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일찍이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한 대한의사협회는 1970년대부터 의학용어집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초반에는 순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광복 후 일본에서 사용하던 의학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니 영어식 표현은 물론이고 한자식 표현도 수두룩했다. 대한의사협회 용어심의위원회 위원을 지낸 은희철 서울대 의대 피부과 교수는 “표의문자인 한자는 한 음절도 수십 개의 다른 의미를 가진 한자들로 표기될 수 있다”며 “한자식 의학 용어를 듣고 의미를 유추해 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 환자 눈높이 맞춰 쉬운 고유어 한자어로

은 교수는 “고유어에는 동사나 형용사 표현이 많아 이해하기 쉽다”며 “고유어를 많이 쓰는 것이 의학용어 순화의 첫 단계”라고 강조한다. 다행히 국어학자들의 노력으로 2001년 발간된 의학용어집 4판부터는 쉬운 우리말을 의학 용어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일례로 ‘천명’이라는 표현은 ‘쌕쌕거림’으로, ‘소양증’은 ‘가려움증’으로 순화하는 등 고유어로 대체해 환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한자어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학적 검사’를 ‘진찰’로, ‘부전’을 ‘기능 부족’ 등으로 순화하는 것이 그 예다. 황 교수는 “오랜 기간 널리 쓰여 온 한자어는 여러 사람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며 “쉬운 한자어를 활용하는 것 또한 고유어 활용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본보도 2001년부터 의학용어 순화에 동참하고 있다. ‘골다공증’을 ‘뼈엉성증’으로, ‘한선’을 ‘땀샘’으로, ‘이개’는 ‘귓바퀴’ 등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다. 또 ‘심인성(心因性)’을 ‘정신탓’으로 바꾸는 등 ‘성’ ‘선’과 같은 일본식 한자 표현도 피하고 있다.

물론 순화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의미 없는 경우도 있다. 파킨슨병, 디프테리아균, 암피실린 등 병명이나 균명, 약명 등은 대체할 마땅한 용어도 없거니와 바꾸면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용어들은 굳이 순화하지 않고 외래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의학용어집에 실리는 순화 용어들은 권장사항일 뿐이다. 의사 국가고시 문제를 출제할 때 일부 용어들을 순화된 용어로 사용해야 하는 등의 규정은 있지만 그 외엔 강제성이 없다. 정훈 서울북부병원 내과 과장은 “모든 의학 용어를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다 바꿀 순 없겠지만 자주 쓰이는 용어들은 순화할 필요가 있다”며 “환자의 눈높이에 맞도록 쉽게 풀어 설명해줄 때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
#의학용어#공공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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