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세요, 고객님” 인사했더니 남자의 신음 소리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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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욕설-성희롱에 시달리는 114센터

《 한겨울 속 한여름. 이곳이 그랬다. ‘그들’은 목이 탔다. 쉴 새 없이 물을 마시며 식은땀을 닦았다. 물 마시는 횟수는 한숨을 내쉬는 횟수와 얼추 비례했다. 몇몇은 외투를 걸어둔 채 반팔 티셔츠만 입었다. 구석구석 대형 선풍기가 힘차게 바람을 날리며 ‘말’로 달궈진 열기를 잠시나마 식혀주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2분가량 이어진 통화를 마친 뒤였다. “(열 받다 보니) 나도 모르게 외투를 또 던져 버렸네요. 출근할 땐 꽉 껴입었는데….” 》

○ 끊기 전에 “끊겠다” 한마디만 해줘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들 행동에서 몇몇 공통점이 보였다.

일단 손과 얼굴이 따로 제각각이었다. 굉장히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 그에 비해 표정은 시간이 정지된 듯 차분하고 건조했다. 통화가 길어질 때면 입술을 지그시 깨물거나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히는 이들도 많았다. 상대와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이는 없었지만 많이 웃었다. 그런데 정말 즐거워서 웃는다는 이는 거의 없다. 단지 웃는 표정이 아니면 유쾌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유쾌한 목소리가 아니면 고객의 말이 거칠어질 가능성이 높아 그게 싫어 웃는다는 얘기다.

21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KT빌딩 8층. 그곳에 자리 잡은 KTIS 114센터의 풍경이다. 이곳에선 230여 명의 상담원이 24시간 교대 근무를 한다. 하는 일은 주로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 때때로 주소 안내나 텔레마케팅 등도 한다.

‘얼굴 없는 상대’를 매일 만나는 이들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다. 보통 감정노동자는 속내를 감춘 채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손님을 대하는 시간이 업무 시간의 절반이 넘는 사람을 말한다.

객실 승무원, 홍보도우미 등 감정노동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얼굴 없는 상대와 마주하면 그 스트레스는 또 수직 상승한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나쁜 말의 경우 서로 보지 않고 말하다 보면 더 거칠고 직설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정희 한양사이버대 교수(상담심리학과)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화로 말할 때 어휘 자체가 달라지고 신분 비하적인 발언을 많이 해 전화 상담원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KTIS 114센터 상담원들은 걸려오는 전화 가운데 10%가량은 반말이나 욕설 등이라고 전했다. 한 명당 하루 평균 1000통을 받으니 나쁜 말로 인한 상처만 하루에 100개가 생긴다는 얘기다.

이곳에서 15년 동안 근무한 한지영 팀장은 “다른 건 이제 다 참겠는데 가족 욕보이는 말만큼은 아직도 너무 아프다”고 했다. 스스로 전화번호를 잘못 알아듣고서 “네 엄마도 너 낳고 미역국 먹었냐” “애들이 학교는 잘 다니느냐”는 등으로 쏘아붙이는 고객에겐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나마 114센터처럼 고객의 전화를 받는 입장은 좀 낫다. 통신사나 카드회사의 콜센터 상담원들처럼 주로 고객에게 거는 이들의 고충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카드회사의 콜센터 상담원 김모 씨는 “고객의 절반 이상은 내 설명 도중 끊어버린다. 다른 건 안 바란다. 전화 끊기 전에 ‘끊겠다’ 이 한마디만 해줘도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 “반갑습니다”로 인사말 바꿔


콜센터 상담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성희롱 발언으로 인한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했다.

민주노총이 2012년 콜센터 상담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상담원들은 월 1회 이상 심한 성희롱을 당했고, 이로 인한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답했다.

114센터의 경우 2006년까지 안내 인사가 “사랑합니다, 고객님”이었다. 그러자 일부 고객들이 “네가 내 얼굴을 보면 사랑하고 싶지 않을 텐데”라는 식으로 받아쳤다. 그래서 2012년부터 “힘내세요, 고객님”으로 바꿨다. 이번엔 이 말을 성적으로 왜곡해 주로 야간 시간에 신음 소리로 대꾸하는 성희롱 고객이 늘었다. 결국 최근엔 야간에만 “반갑습니다, 고객님”으로 인사말을 또 바꿔야 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뭘까. 취재진이 A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 8명을 대상으로 물어봤더니 “죄송합니다”가 가장 많았다. 보통 5분가량 통화를 하면 10회 이상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는 설명. 상담원 유모 씨는 “고객의 짜증을 미리 차단하려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한다. 그렇게 영혼 없이 죄송하단 말을 남발하다 보면 나 자신이 참 보잘것없고 처량하단 생각까지 든다”고 토로했다. 죄송하다는 말은 상담원을 무시하는 불량고객들을 응대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고객이 “그러니까 콜이나 받지” “초등학교는 나왔니” “그렇게 못 알아들으니 그렇게 사는 거야” 등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속으론 울컥하지만 마땅히 따질 말이 없어 그냥 죄송하다는 말로 빠져나온단 얘기다.

정은경 KTIS 114센터 상담원은 고객의 막말로 상처를 받으면 일단 책상 위에 놓아 둔 가족 사진부터 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다독인다. 강아지나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보면서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 치유하는 이들도 많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유원모 인턴기자 한양대 교육학과 4학년

모진수 인턴기자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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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센터#콜센터 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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