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3> 전쟁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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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3개 해변 시간차 공략… 최악 조건서 최고 전과

얕은 수심 등 지리적 장벽 속 배 230척 동원 7만명 상륙
보급로 막으며 포위망 완성

낙동강 전선 북한군 7만명…고립된채 달아나기 시작
2만5000명만 38선 넘어가

《6·25전쟁에서 ‘필연적 작전’이 있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먼저 당시의 전황은 한반도 중부로의 상륙작전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한반도 동남부 낙동강전선에 아군 적군 군대가 대부분 몰려 있었으므로 아군이 중부로 상륙한다면 북한군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 아울러 북한군의 보급로도 단숨에 자를 수 있었다. 남한의 교통망이 모두 서울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서울을 장악하면 북한군은 물자 보급이 실질적으로 단절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륙작전은 또 ‘서울 탈환’이라는 정치적 의미도 당연히 컸다.》

○ 정세

게다가 미군은 상륙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다섯 해가 되는 해였으므로 미 해군과 해병대에는 상륙작전 경험을 지닌 부사관, 장교, 지휘관이 많았다. 유엔군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상륙작전을 열정적으로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그는 상륙작전을 통해 일본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상륙작전에 대비해왔다.

당시 해리 트루먼 정권은 육군을 중시하고 공군을 강화하는 대신 해군을 경시하고 해병대를 아예 해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입지를 강화하고 싶어 했다. 이처럼 조건, 능력, 의지가 모두 갖추어졌다는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을 아군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공했고 성공을 보장했으며 효과를 극대화했다.

○ ‘인천’이라는 지리적 특징

원래 인천은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지리적 장벽이 많은 곳이었다. 한 미군 장교가 “인천은 우리가 꼽을 수 있는 자연적, 지리적 장애물을 모두 갖췄다”고 말할 정도였다.

인천은 간만(干滿) 차가 10m나 된다. 또 수심이 매우 얕아서 썰물 때는 긴 갯벌이 드러나 만조 때에만 큰 배들이 해안에 접근할 수 있다.

바다 위로 해군 상륙함들이 다니려면 수심이 7m 정도는 돼야 한다. 특히 전차를 실은 상륙함(LST·Landing Ships Tank)의 경우 8, 9m는 돼야 한다. 인천은 이런 수심을 제공하는 만조가 고작해야 한 달에 한 번, 사나흘 정도 계속되는 곳이다.

그나마 밀물 때에도 큰 배들은 단 하나의 수로를 통해서만 인천에 접근할 수 있다. 원래는 수로가 두 개인데 인천 서남쪽 14km에 있는 팔미도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간만 차가 워낙 크므로 수로의 물살이 무척 빨라 최고치는 무려 7, 8노트에 이르는데 이는 상륙함의 속도와 비슷하다. 이렇게 험한 수로는 배들이 기동하거나 돌아설 공간이 거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적들이 기뢰를 부설하기에 좋고 흐린 물과 긴 갯벌 탓에 기뢰 탐지나 제거도 어려운 조건이다.

원래 맥아더 원수 사령부에선 상륙작전 후보지로 군산과 동해안의 주문진 등도 포함시켰지만 각종 지리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가까운 인천의 이점이 워낙 컸다. 맥아더 원수의 선택은 처음부터 인천이었다.

○ 상륙작전의 내용


1950년 8월 12일 맥아더 원수는 디데이(D-day)를 9월 15일로 정해 작전계획을 시달했다. 그날 예상되는 만조 때 수심은 9.6m였다. 그날을 놓치면 한 달 후인 10월 10일에나 충분한 수심을 얻을 수 있었다.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불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은 미군 해병대, 해군, 육군 및 한국 해병대 등 7만1339명이었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230척이 넘는 배로 구성된 함대가 동원되었다.

작전의 목표는 크게 둘이었다. 인천항을 점령하고 해두보(海頭堡)를 확보해 김포 비행장을 조속히 점령하고 한강을 도하해 서울을 점령한 뒤 서울의 북쪽, 동북쪽 및 동쪽에 저지 진지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임무는 미군 해병 1사단과 한국 해병대가 맡았다.

다른 하나는 낙동강전선에서 북상한 아군과 함께 적군을 포위해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미군 7사단과 한국군 17독립연대가 맡았다.

○ 작전의 경과

마침내 9월 15일 오전 5시 20분 ‘크로마이트 작전’이라고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인천은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최악이었지만 서울과 가까워 이곳을 장악하면 동남부에 몰려 있던 북한군의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던 데다 보급로까지 차단 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군의 사기와 병력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마침내 9월 15일 오전 5시 20분 ‘크로마이트 작전’이라고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인천은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최악이었지만 서울과 가까워 이곳을 장악하면 동남부에 몰려 있던 북한군의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던 데다 보급로까지 차단 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군의 사기와 병력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당시 인천엔 부대가 상륙하기 좋은 해변이 세 곳 있었다. 미군은 작전계획에서 세 곳의 해변 이름을 ‘그린’ ‘레드’ ‘블루’라 명명했다. ‘그린비치(Green Beach)’ 해변은 월미도 서북쪽 해안 길이 200야드(약 183m) 지역이었다. ‘레드비치(Red Beach)’는 인천항을 보호하는 220야드의 해벽(海壁)이었다. ‘블루비치(Blue Beach)’는 레드비치 서남쪽 지역으로 4m가 넘는 해벽이 있었다.

인천항에서 가장 중요한 지형은 항구 바로 앞에서 접근로를 굽어보는 월미도였다. 월미도를 먼저 장악하지 못하면 인천항에 접근할 수 없었다. 자연히 월미도의 그린비치가 최초 공격 목표가 되었다. 작전 개시 5일 전부터 상륙군은 인천지역의 북한군에 공습을 했다. 이틀 전부터는 함포사격을 했다. 함포사격은 월미도에 집중되었다.

마침내 9월 15일 오전 5시 20분 크로마이트 작전이 시작됐다. 1시간가량 뒤인 6시 33분 작전 계획보다 3분 늦게 상륙정들이 월미도 그린비치에 닿았고 5해병연대 3대대 병력이 해변으로 달려갔다. 7시 30분에 3대대장 로버트 태플레트 중령이 월미도를 반 넘게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적의 저항은 약했고 4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주봉(主峰)인 래디오힐도 대부분 점령했다.

레드비치와 블루비치 공격은 다음 밀물 때인 오후 7시 30분에 시작되었다. 레드비치에 상륙한 5해병연대 1대대와 2대대, 블루비치에 상륙한 1해병연대는 적군의 거센 저항에 부닥쳤다. 그러나 병력이 워낙 적었으므로 북한군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작전 첫날 패트릭 도일 제독이 지휘한 공격부대는 1만3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켰다.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부대 일지에 “디데이는 대체로 계획대로 지나갔다”고 적었다. 한국군 해병대는 미군 5해병연대에 배속되어 상륙했다. 이 부대는 인천시에서 공산군 잔당을 소탕했다.

인천을 석권한 상륙군은 바로 서울 공략에 나섰다. 북한군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모아 서울 방어에 투입했다. 25여단, 9사단 87연대, 18사단 일부 병력이 서울지구 방위사령부의 주요 부대였다. 북한군의 주저항선은 안산(296고지)과 그 줄기였다.

가장 치열했던 싸움은 연희고지(66m)와 88m고지에서 벌어졌다. 한국군 1해병대대와 미군 5해병연대 2대대는 큰 손실을 보면서도 줄기차게 공격해 이틀 만에 연희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는 서울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결정했다. 북한군은 시가전으로 저항했지만 이미 주력부대는 의정부 방향으로 빠지고 있었다.

9월 28일 마침내 아군은 서울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튿날 낮 12시 국회의사당에서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이양했다.

당시 감사 연설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참석한 미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일일이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 포위망의 완성

이제 남은 일은 낙동강전선의 아군이 북상한 후 10군단과 연결해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미군 1군단이었다. 선봉은 군단 중앙에 자리 잡은 미군 1기병사단이 맡았다.

9월 23일 오전 4시 30분 1기병사단 선봉 ‘린치 임무단’이 경북 상주 낙동리 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낙동리 나루를 건넌 뒤 10군단 예하 미군 7사단이 기다리는 오산으로 향했다.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천안에서 북한군을 따라잡았다.

로버트 베이커 소위가 이끈 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의 전차 3대도 진격속도를 늦추지 않고 아직 적군 전차부대들이 있는 지역을 지나 기적적으로 오산의 미군 7사단 31연대 지역에 닿았다. 9월 26일 오후 10시 26분이었다. 린치 임무단 본대는 9월 27일 오전 8시 26분에 닿아 마침내 10군단과 8군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 성공 요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본질적으로 ‘기습’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북한군은 인천에 그렇게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이렇게 큰 작전은 사전에 비밀로 남을 수가 없다. 상륙작전이 펼쳐질 곳이 인천이라는 것은 당시에 너무도 잘 알려져서 도쿄 신문기자협회가 그 작전을 ‘상식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날씨나 수심이 예측 가능했기 때문에 작전이 가능한 날짜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에 상당한 병력이 있었지만 인천에 상륙작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인천항이 기뢰 부설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뢰도 제때 부설하지 않았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인천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상륙작전을 펴기에는 큰 장애물이 많은 곳이어서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적의 지휘관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작전을 시도할 만큼 경솔하지 않으리라고 추론할 것이다”라는 맥아더 원수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북한군 지휘부는 낙동강전선 승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많은 인원과 장비가 그곳에 투입돼 있어 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한군은 포로와 인질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대전에서만 약 7000명의 남한 인사와 40명의 미군 포로가 학살되었다. 1950년 10월 31일 유엔군사령부는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된 사람이 2만6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2주간에 걸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6·25전쟁의 구도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전선이 붕괴되었고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의 패주가 시작된 것이다. 낙동강전선에 있던 북한군 7만 명 가운데 38선을 넘어간 병력은 겨우 2만5000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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