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광현]규제혁파 립 서비스 ‘고마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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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노인네, 늙으면 죽어야지’ ‘노처녀, 시집 안 간다’ ‘장사꾼, 밑지고 판다’. 흔히들 말하는 대한민국 3대 거짓말이다. 이제 ‘대통령, 규제 풀겠다’는 말도 하나 추가하게 생겼다. 1970, 80년대에는 정부 규제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다. 초년병 기자로 경제부처를 출입하던 90년대 초반 이후 정부가 나서 규제를 풀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정부는 규제개혁을 외치고 현장에서는 규제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수십 년째 ‘안 돼 공화국’

그동안 용어도 다양한 변천을 겪어왔다. 처음에는 탈규제(Deregula-tion)라는 말이 유행했다가 규제완화, 규제개혁, 규제철폐, 규제혁신, 규제혁파로 점점 수위를 높여왔다. 다그친다고 관료들이 규제 푸는 작업에 나설까. 관료들이 규정을 전향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큰 틀에서는 의회가 만들어 준 법률에 따라 집행한다. 규제는 공무원 존재의 이유인 동시에 권한의 원천이다. 공무원에게 포기 작업을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포기하라는 꼴이다. 그러다 보니 ‘신용카드 가입 시 필수 동의 항목을 6개에서 2개로 줄였다’는 게 규제완화 백서에 주요 개선 사례로 등장하게 된다.

비상상비약 슈퍼마켓 판매, 의사·간호사 증원 확대, 원격 진료,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카풀 앱 등은 정부도 인정하는 핵심 규제 리스트 중 일부다. 대부분 국회가 법으로 풀어야 한다. 국회의원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규제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 미래는 없다. 중국보다 더 심하다”라며 열을 올린다. 그러다가 소관 상임위나 지역구에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표정이 싹 바뀐다. 수십 년간 줄기차게 떠들어도 큰 규제가 안 풀리는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꼬리표 없는 규제 없다. 그 꼬리표는 대부분이 이해관계와 그에 얽힌 ‘표’다. 규제와 관련해 국회를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추가로 더 안 만들면 다행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혁신의 가장 큰 이해당사자는 국민이고 국민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표 혹은 지지율과 맞바꿀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방법이 있긴 있다. 국민들 인식에 확실히 남을 만한 규제를 단 한 건이라도 푸는 것이다. 그것으로 ‘혁명적 규제혁파’ 의지를 실천으로 먼저 보여준 다음에 다른 규제들도 하나씩 부숴나가면 된다. 우버 택시로 첫발을 뗄 수도 있다. 비교적 새로운 기술·서비스 분야이고, 중국도 하고 있는 사업이다. 택시업계라는 강력한 이해관계자들이 버티고 있지만 규제혁신의 혜택을 국민들이 폭넓게 받을 수 있는 사안이다.

총리·장관으론 어림없어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만 할 게 아니라 욕먹을 각오를 하고 앞장서야 한다. 청와대 수석들은 뒤에서 지적만 하는 평론가 집단이 아니다. 여야 의원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자치단체장과 협상도 해야 한다. 택시운전사, 의사, 약사 등 이해집단도 설득해야 한다. 죄송한 말이지만 임명직 총리, 부총리, 장관 정도로는 이익집단의 철옹성을 깨기엔 어림도 없다. 비정규직 제로화, 최저임금 1만 원, 강남 집값 잡기, 적폐청산에서 보여준 무모할 정도의 결기와 실천력을 정작 가장 큰 이해당사자가 국민인 규제혁신에서 발휘할 용의는 없는가. 토론회, 발표회 같은 립 서비스는 ‘이제 마이 무따, 고마해라’.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정부 규제#규제개혁#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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