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돈 창구’ 말聯, 한국에 대출 거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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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머니 年 1조달러… “유치하려면 수쿠크 발행하라”
이슬람채권법 표류 후폭풍

세계 최대 이슬람 금융시장을 갖고 있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일반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국내 금융회사에 “수쿠크 채권을 발행해야만 가능하다”고 통보해 국내 금융회사들의 자금줄이 막히고 있다. 이슬람 채권법(일명 수쿠크 법안)의 국회 통과가 무산된 이후 국내 금융회사들의 오일머니 유치가 더욱 어려워지면서 ‘수쿠크 후폭풍’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2일 기획재정부와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말레이시아 정부는 한국의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빌리기로 한 35억 링깃(약 11억5000만 달러) 가운데 20억 링깃은 수쿠크 채권의 발행을 통해서만 빌릴 수 있다고 통보했다. 산업은행은 국내 금융회사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주로 사용한 ‘링깃본드’를 통해서 자금을 전액 조달하려고 했었다. 링깃본드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고안된 이슬람 채권이 아니어서 한국 금융회사들은 1990년대부터 오일머니를 유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이용해왔다.

산업은행은 이슬람 채권법이 통과되지 않는 한 절반 이상의 돈은 쓰고 싶어도 쓸 수 없게 됐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수쿠크로 자금을 조달하라고 요구한 것은 한국금융회사 가운데 우리가 처음”이라며 “말레이시아 측 반응이 이상해 알아보니 이슬람 채권법을 둘러싼 한국의 상황을 알고 언짢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국내 금융회사들은 스스로 말레이시아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을 포기하고 있다. 2008년 링깃본드를 통해 20억 링깃(6억6000만 달러)을 빌린 현대캐피탈은 최근 링깃본드를 통한 추가 자금조달 계획을 중단했다. 2009년 10억 링깃(3억3000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조달한 하나은행도 더는 링깃본드를 통한 자금조달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
▼ “중동 오일머니 유치 막히나” ▼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컨설팅 회사로부터 이슬람채권법 무산으로 링깃본드를 통한 자금조달은 더는 어렵다고 들었다”며 “이슬람 자금은 금리가 낮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4차례나 링깃본드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만 지금은 다른 투자처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중동 산유국의 막대한 오일머니를 들여와 이슬람 금융 허브를 표방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수쿠크 채권 확산을 위해 일반 채권 방식을 줄이겠다는 입장”이라며 “국내에서 유치한 대부분의 오일머니가 말레이시아를 통해 들어왔지만 앞으로는 이를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 채권법 무산으로 그동안 금융회사들의 이슬람 자금유치 우회로가 막히면서 한국만 연간 1조 달러에 달하는 오일머니 유치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특히 이슬람 금융시장을 적극 활용하려던 금융회사와 기업들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2007년부터 수쿠크 발행을 준비하면서 이슬람금융시장 진출을 준비해 온 증권업계는 법안 통과가 지연되면서 더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향후 해외 대형 공사수주 경쟁에서 자금을 얼마나 싸게 조달하느냐가 수주의 관건이었던 건설업계도 이번 사태가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중동 국가들과 주로 거래하는 정유업계와 조선업계는 이슬람채권법 논란이 이들 국가와의 거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반면 세계 각국은 이슬람금융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영국은 1990년대부터 정부와 재계가 협력해 비(非)이슬람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슬람금융을 육성한 결과 서방의 이슬람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싱가포르와 홍콩 등은 일찌감치 이슬람채권 발행이 용이하도록 세제를 개편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최근 중동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내년 초 수쿠크를 발행할 예정이다.

글로벌기업들은 더 적극적이다. 미국 셸사와 일본 도요타 등이 말레이시아에서 수쿠크를 잇달아 발행하고 있으며 일본의 오릭스 라싱, 다이와증권도 이슬람 현지 제휴를 통해 해외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이슬람금융 도입을 꾀하고 있다.

이슬람금융에 정통한 한 컨설팅업체 임원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신흥국에서도 수쿠크 발행을 통해 이슬람 자금 유치에 나선 상황”이라며 “이슬람 국가들이 한국의 이슬람 채권법 무산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오일머니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수쿠크(Sukuk) ::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고안된 채권. 실물거래 형식을 빌린다. 예컨대 산업은행이 이슬람자금을 빌릴 경우 산은은 자기 건물을 이슬람 투자자에게 파는 형식을 취해 매각대금을 활용한다. 산은은 이자 대신 건물사용료를 지불한다. 만기가 되면 반대매매로 소유권을 원상회복시킨다. 문제는 부동산이 오가면서 취득·등록세, 부가세, 양도세 등이 발생한다는 것. 이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이 수쿠크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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