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맞선 ‘북러중’, 과거 보면 미래 보인다[김상운의 빽투더퓨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일 11시 00분


코멘트

[7] 북러중 3국 관계의 역사

최근 한미일 3각 동맹에 맞서 북러중 3각 구도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김정은과 푸틴이 9월 13일 정상회담에서 무기거래와 군사기술 제공을 협의하는 등 탈냉전 이후 유례없는 밀착을 보여주었죠.

그러자 열흘 뒤 시진핑이 한덕수 총리에게 방한 의사를 먼저 내비치며 북러 밀착에 미묘한 견제구를 날렸습니다. 앞서 러중은 미국에 맞서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는 모습을 보여왔죠. 역사적으로 북러중 3각 구도를 결정한 변수는 무엇이고, 이것이 향후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미중 데탕트와 北中 균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올 3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건배하고 있다. 모스크바=AP·뉴시스


북러중 3국 관계는 냉전시대 사회주의 당-국가(party state)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국가관계가 형성된 거죠. 미국이라는 공통의 적, 다시 말해 대미(對美) 위협인식이 냉전 당시 3국 관계의 핵심 변수였습니다. 이는 미중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신(新)냉전이 본격화 된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프레임을 바탕으로 대미 위협인식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 1970년대 미중 데탕트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중갈등 시기의 북중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979년 미중 수교로 북한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는 6.25 전쟁 종전 이래 중국에 대한 북한의 방기(abandonment) 우려가 극대화된 시점 중 하나였을 겁니다. 방기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비대칭 동맹에서 안보위기에 빠진 약소국이 강대국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반대로 강대국 입장에선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연루·entrapment)을 떠안게 되죠(5회 70주년 맞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비화·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903/120996577/1 참조)

‘미제와의 투쟁’을 앞세워 통치 정당성을 확보한 김일성으로서는 사회주의 맹방인 중국과 미국의 전격적인 수교를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곤혹스러웠습니다(이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중심, 2000년) 참조)

미중 데탕트에 대한 김일성의 인식은 미중수교 1년 뒤인 1980년 10월 10일 그가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연설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죠.

“신흥세력 나라들은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여야 하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거나 남의 대리인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흥세력 나라들은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존중하여야하며 남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남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하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김일성 저작집 35권, 1987년) 참조)

1954년 10월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마오쩌둥(오른쪽)   징화시보 제공
1954년 10월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마오쩌둥(오른쪽) 징화시보 제공


여기에서 김일성이 언급한 ‘대리인’은 미국에 접근한 중국을 가리키며, 내정 간섭이나 이익침해 운운은 미중이 북한을 둘러싼 적대 구조를 청산하고 한반도를 공동 관리하기로 한 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행위가 사회주의 근본 원칙을 훼손했으며, 북중동맹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제국주의자들과 원칙적 문제를 가지고 흥정하여서는 안 되며 제국주의자들에게 혁명의 근본 이익을 팔아먹어서는 안됩니다.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 불가담 나라들은 제국주의 나라들과 국가관계를 좋게 가지기 위하여 반제적 입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나라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중국이 미국과 맞선 종전의 대결 구도로 복귀해야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한 혁명의 근본 이익에는 미제와의 대결을 통한 한반도 통일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중국이 자국의 외교적 이익을 위해 조선의 안보이익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낸 겁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북중동맹의 균열 위험에 대한 경고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미국과의 데탕트에 나선 결정적 배경이자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중소 갈등’까지 은연 중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당, 로동당들은 의견 상이(相異)로 하여 통일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에서 마땅히 놀아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의견 상이가 더는 확대되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역량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통일 단결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합니다.”

김일성이 이 국면에서 중소갈등 해소와 미제에 대한 공동투쟁을 강조하고 나선 건 단순히 원칙적인 대의를 표명한 게 아닙니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다면 북한도 소련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요. 이처럼 김일성이 중소갈등 국면에서 소련으로 접근 가능성을 내비칠 정도로 미중 데탕트는 북한에 다급한 안보 위협을 가져온 겁니다.

미중갈등과 北中 밀착
미중갈등의 중심에 선 시진핑 중국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뉴시스
미중갈등의 중심에 선 시진핑 중국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뉴시스


역사적으로 미중관계의 진전이 북중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것과는 반대로 미중갈등은 북중 밀착으로 이어졌습니다. 탈냉전 이후 미중관계는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소련 붕괴로 유일 패권국이 된 미국으로서는 과거처럼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협력할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중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경제력이 점차 쇠퇴한 반면, 중국 경제는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면서 미국의 중국 견제가 노골화되었기 때문이죠.

미중갈등에 따른 북중 밀착은 1, 2차 북핵 실험 직후 양국 움직임의 확연한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중국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제멋대로(悍然)’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북한을 공개 비난합니다. 이어 UN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1718호)에 처음 찬성하죠. 그해 9월에는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에 맞서 대북 석유수출을 중단했죠. 2008년 3월 김정일이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하기까지 북중관계 회복에 1년 5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미중갈등이 본격화 된 이후인 2009년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중국의 대북 메시지는 현저히 완화됐습니다. ‘제멋대로’와 같은 거친 문구는 사라졌고, 그해 8월 우다웨이 한반도사무 특별대표가 방북하는 등 핵실험 3개월 만에 양국 고위층 접촉이 이뤄졌죠. 10월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북중수교 60주년을 맞아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1년 5개월의 긴 냉각기를 가진 1차 핵실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은 미중갈등과 북중밀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중국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냉정과 절제” “대화를 통한 외교적 타결”을 운운하며 북한을 감쌌습니다. 이에 오바마가 그해 6월 G20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에게 “자제를 발휘하는 것과 계속적인 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것은 별개”라며 중국을 강하게 비판했죠.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 직후 중국은 주중 북한대사를 초치하고 대북 수출금지 목록을 발표했지만, 안보리 제재 수위를 낮추려고 노력합니다. 이에 따라 북한 민생이나 인도주의를 위한 예외 조항을 안보리 결의안 2270호에 반영시키죠. 이에 호응하듯 북한은 같은 해 9월 9일 5차 핵실험을 실시하기 사흘 전 최선희를 중국에 보내 이를 사전에 통보합니다. 중요 외교사안에 대한 정보 공유를 규정한 조중동맹 조약을 의식한 조치였죠.

트럼프 집권 이후 미중갈등이 한층 격화된 가운데 2018년 3월 양국은 정상회담을 열고 냉전시대 북중동맹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당시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북중 친선을 대를 이어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이어나가는 것은 숭고한 임무”라고 말합니다. 시진핑도 “북중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친선이며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화답했죠.

같은 해 5월 개최된 2차 북중 정상회담은 6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열렸습니다. 비핵화 협상에 대한 사전 정보공유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역시 조중동맹 조항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 겁니다. 이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시진핑을 만난 이후 달라졌다”며 대놓고 불쾌함을 표시합니다.

중소갈등과 북한의 선택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만나 건배를 하고 있다.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만나 건배를 하고 있다.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북한은 사회주의 혈맹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중관계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은 반면, 중소갈등을 통해선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냉전시기 사회주의 양대 강국인 소련과 중국을 넘나들며 실익을 취한 거죠. 북한은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냈습니다. 자, 그럼 1960, 70년대로 시계를 돌려 보겠습니다.

사회주의 종주국 지위를 둘러싼 중소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이어져 1964~1969년 양국은 4189회에 걸쳐 국경분쟁을 벌입니다. 1969년 3월 우수리강 젠바오섬에서 교전이 벌어져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소련은 중국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검토하죠. 같은 해 8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가 미국 측에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마상윤 “적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데탕트 초기 미국의 중국 접근” (국가안보패널 연구보고서, 2013년) 참조)

미국은 이 같은 중소갈등을 적극적으로 파고듭니다. 닉슨이 1972년 2월 베이징을 방문해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중국에 제공한 게 대표적입니다(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 참조) 닉슨은 당시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중소관계 악화가 미중 데탕트로 이어진 순간입니다.

북한은 중소갈등 국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으면서 실리와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미중 데탕트에 맞서 소련과의 밀착 가능성을 암시한 김일성의 1980년 연설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하지만 1970년대 미소 간에도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북한의 이런 줄타기 외교는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소련이 1970년대 초반부터 북한에 대한 고성능 무기판매와 지원을 줄인 게 대표적입니다. 1979년에는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 혜택마저 대폭 축소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북한은 1970년대 중소갈등 상황에서 소련으로 편승을 시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국을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외교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탈냉전 이후 NATO의 동진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회복을 서두릅니다. 1996년 4월과 1997년 4월 러중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수립과 ‘다극체제’ 선언을 통해 미국 견제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러중 관계는 미일동맹 같은 군사동맹 수준이 아닌 전략적 제휴 단계에 머물러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과거의 영토분쟁에서 알 수 있듯 양국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상호 위협인식이 잠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인 미국이 한국, 일본과 맺고 있는 양자 동맹에 비해 결합력이나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북중러 3각 구도 미래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북핵사태와 미중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중러의 대미 위협인식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입니다. 이는 3국간 밀착이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를 100% 지지하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극동지방에 영토를 둔 러시아가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푸틴은 2001년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항상 러시아의 국가이익의 영역 내에 있다”고 선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던 이유입니다. 이승만은 1904년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속히 러시아의 무도함을 꺾어 동양으로 뻗어 나오는 세력을 막아야 동양 각국도 안전함을 얻을 것”이라고 썼죠(4회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독립외교·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813/120687443/1 참조)

자주 외교를 유독 강조하는 북한이 과거 냉전시대처럼 러시아,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대북제재 이후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거의 100%에 달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일종의 대체재로 활용하는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러시아의 경제, 외교적 여건이 녹록치 않은 게 한계입니다. 러시아도 북한의 편승에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최근 푸틴-김정은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이나 성명을 남기지 않는 등 러시아가 북한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는 게 이와 무관치 않을 겁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 러시아의 미묘한 경쟁관계 등을 감안할 때 북러중 3각 구도가 한미일 3각 동맹에 맞서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