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항의’ 시위대에 총 쏴 2명 숨지게한 10대 ‘무죄’…들끓는 美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1일 1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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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현지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에서 카일 리튼하우스(18)가 눈을 감고 판결을 듣고 있다. 배심원단은 25시간 넘는 심리 끝에 리튼하우스측의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여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2021.11.20 뉴시스
19일(현지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에서 카일 리튼하우스(18)가 눈을 감고 판결을 듣고 있다. 배심원단은 25시간 넘는 심리 끝에 리튼하우스측의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여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2021.11.20 뉴시스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총을 쏴서 2명을 숨지게 하고 1명을 다치게 한 미국의 10대 백인 청소년이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았다. 평결에 대한 비판론과 이에 맞선 옹호론이 동시에 거세지면서 미국 사회가 들끓고 있다. 사건의 쟁점이 됐던 정당방위의 인정 여부와 함께 인종차별, 총기 규제 등을 놓고 지속돼온 미국의 양극화 현상이 다시 심화될 조짐이다.

미국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의 배심원단은 19일(현지 시간) 2건의 살인과 1건의 살인미수 등 모두 5가지 혐의로 기소된 카일 리튼하우스(18)에게 모든 혐의에 대한 무죄 평결을 내렸다고 현지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1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사흘 연속 이어진 심리와 이후 26시간의 논의를 거쳐 그의 무죄를 결정했다.

리튼하우스는 17세였던 지난해 8월 커노샤에서 흑인 남성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의 과잉진압 총격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건이 발생한 뒤 항의 시위가 벌어지자 백인 자경단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가 시위 참가자 2명에게 AR-15 반자동 소총을 쏴 사망케 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는 체포된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해왔다. 약탈과 방화로 시위가 격해지던 상황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경단과 함께 활동하던 중 시위자들이 자신을 때리며 총을 빼앗으려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리튼하우스는 재판을 받는 도중 배심원단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반면 검찰은 그가 목표물을 뚫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풀 메탈 재킷’ 탄환 30발을 총에 장착하고 있었다는 점, 총격사건 뒤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사람을 쏘아죽인 유일한 사례였다는 점 등을 들어 그의 유죄를 주장했다.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카일 리튼하우스(18)의 무죄평결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1.11.20 뉴시스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카일 리튼하우스(18)의 무죄평결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1.11.20 뉴시스
이 사건은 사흘 간의 공개 심리가 FOX뉴스와 CNN등 주요 뉴스매체를 통해 하루 종일 생중계될 정도로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10대 청소년이 자경단을 자처하며 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다 사람을 죽인 행위는 마땅히 처벌돼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영웅시하며 무죄 평결을 촉구해왔다. 후원금을 모금해 200만 달러에 이르는 리튼하우스의 보석금을 대고 지난해 11월 그를 석방시킨 것도 이들 총기소유 지지자들이었다.

리튼하우스는 1급 살인 등 중범죄 혐의에서 유죄가 인정될 경우 종신형을 받게 될 처지였다. 그는 무죄 평결을 받은 뒤 변호사를 통해 “배심원단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면서도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CNN방송에 따르면 배심원단의 최종 평결에 대해 검찰은 항소할 수 없어 무죄 평결은 이대로 확정된다.

배심원단의 인종 비율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희생자들은 모두 백인이지만 리튼하우스 역시 백인이라는 점에서 인종차별 논란은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배심원단의 최종 평결에 대해 “피의자가 흑인이었다면 결정이 달랐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평결이 내려지자 희생자의 유족들은 “사법 시스템의 실패”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제이컵 블레이크의 가족과 변호사는 “오늘 결정은 가증스럽다”며 “이는 앞으로 매우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됐다”고 우려했다.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그의 무죄 평결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수백 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리튼하우스 사건은 아직 안 끝났다”, “인종주의에 굴복하지 않겠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번 사건은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민주당이 경찰개혁과 총기 규제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을 압박하고, 공화당은 평결을 근거로 정반대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회 분열이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 대통령은 평결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배심원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으며 나는 이를 존중한다”고만 짧게 답변했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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