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놓고 ‘나만 믿으라’는 트럼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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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우선주의’ 외교안보정책 첫 발표

“나를 믿으세요. 오로지 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한국 대선에 단골로 출마해 온 허경영 씨를 떠올리게 하지만 미국 공화당 대선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한 말이다. 27일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처음으로 발표하는 자리에서다.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로 이름 붙여진 정책발표회에서 트럼프는 처음으로 프롬프터를 사용했다. 외교안보 분야 문외한이라는 비판을 의식해 최대한 미국 주류사회의 문법에 충실한 자세였다. 트럼프는 ‘위대한 미국’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냉전 종식을 불러온 로널드 레이건을 언급하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대의 외교는 ‘완벽한 총체적 재앙’이라며 “비전도, 목적도, 방향도, 전략도 없다”고 맹비판했다.

‘4무(無) 외교’는 5가지 문제를 초래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경제가 추락하면서 국방력을 약화시켰고 동맹국이 짊어져야 할 분담을 외면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우방국은 더 이상 미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중국 같은 경쟁국도 미국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외교정책은 선명한 목표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단순 명쾌한 논리였고 예로 든 사례도 비교적 적절했다.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48개국 중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분담하는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곤 4개국밖에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가 쿠바 같은 과거의 적국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등 동맹국을 방문하러 갔을 때 공항까지 영접 나오는 정상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이라크와 리비아, 시리아에서 민주체제를 수립하겠다고 개입했다가 갑자기 빠져나오는 바람에 ‘이슬람국가(IS)’라는 화근만 키웠다는 비판은 예리했다. 민주당 선두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겨냥해 2012년 리비아 벵가지 미 대사관 테러 때 늑장 대처를 비판하며 “오바마-클린턴의 개입 정책은 나약함과 우왕좌왕, 혼란, 엉망진창만 불러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해법에 대해선 “나만큼 잘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 나만 믿으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 것은 3가지였다. 이슬람 급진주의 확산을 막는 장기계획을 세우고, 미국 경제를 살려 국방력을 재건하며 미국 이익 관점에서 외교정책을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모두 추상적인 말뿐이었다. 비즈니스의 귀재인 자신이 미국 경제를 부흥시켜 국방력을 강화하고 협상의 달인으로서 미국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논리만 반복해댔다.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무슬림 입국 금지, 동맹국 핵무장 용인 등 논란이 된 이슈는 모두 살짝 비켜갔다. 영국 BBC는 “무엇을 할 건지는 많았지만 어떻게 할 건지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은 외교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면서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많았다며 10가지 모순을 조목조목 짚었다. 우방국에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겠다며 방위비 부담을 협박하는 자가당착, “국가 건설에 개입하지 말자”는 고립주의와 “서구가치와 제도를 다시 활성화하겠다”는 개입주의의 혼재, 외교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해 놓고는 뒤에선 “예측 불가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모순 등이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망치가 있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사람의 경험이 부동산 거래로 제한돼 있으면 모든 게 임대계약 협상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를 비꼰 것이다.

가장 뼈아픈 지적은 같은 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 입에서 나왔다. “세계에서 미국이 하는 역할을 한심하게 이해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트럼프#외교안보정책#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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