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처럼 죽기 싫다… 존엄사 권리를 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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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영방송 진행자 다이앤 림의 호소
파킨슨병 악화 존엄사 원했던 남편… 합법적인 죽음의 길은 단식뿐
임종 못 지킨채 떠나보내자 분노… 방송서 ‘존엄사 허용’ 논쟁 불지펴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의 유명 진행자인 다이앤 림 씨 부부의 단란했던 한때를 담은 가족사진. 남편 존 림 씨는 지난해 6월 파킨슨병으로 사망했다. 사진 출처 워싱턴포스트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의 유명 진행자인 다이앤 림 씨 부부의 단란했던 한때를 담은 가족사진. 남편 존 림 씨는 지난해 6월 파킨슨병으로 사망했다. 사진 출처 워싱턴포스트
스스로 죽기를 선택한 남편은 결국 먹고 마시기를 중단했다. 결혼해 54년을 함께 사는 동안 부부는 몹쓸 병에 걸린 상대방이 죽음을 선택했을 때 이를 인정하고 마지막 길을 도와주기로 누누이 약속했다.

큰 병에 걸린 남편은 고통을 끝내 달라며 의사에게 약물을 요청했다. 하지만 주치의도, 심지어 의사인 딸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주치의는 “(우리가 사는) 메릴랜드 주에서는 존엄사가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대법원이 판결로 열어 놓은 길은 먹고 마시는 것을 스스로 끊어 죽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파킨슨병이 악화돼 손을 움직일 수도, 혼자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갈 수도 없게 된 남편은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나머지 어느 날 아내에게 “단식을 통해 죽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의 진행자인 다이앤 림(79)이 지난해 6월 남편 존 림을 떠나보낸 길고 긴 열흘은 이렇게 시작됐다.

병원에 있던 남편 존은 단식 이틀 뒤부터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이앤은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단식 9일째 되던 날 이들 부부의 친구인 목사가 찾아와 영면을 위한 기도를 해 줬다. 다이앤은 붉은 포도주 한 방울을 남편의 입술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마지막 의식을 치렀다.

밤새 병상을 지킨 다음 날 아침. 잠시 집에 들러 샤워를 하던 다이앤은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다이앤이 병실을 나선 지 20분 뒤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영원한 잠에 빠졌다는 소식이었다.

남편의 임종을 보지 못한 다이앤에겐 엄청난 슬픔이 몰려왔다. 그리고 분노가 뒤를 이었다. 존엄사를 미리 계획할 수 있었다면 그녀와 두 아이들은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킬 수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이앤은 15일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 옳지 않다”고 말했다. 남편이 좀 더 존엄한 방법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쉽고 느린 영어로 날카로운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NPR 간판 앵커 다이앤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뒤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다이앤 림 쇼’를 통해 “남편은 아주 특별하고 용기 있는 방법을 택했다”며 “방송을 통해 내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이 문제(존엄사)가 널리 공론화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130명을 안락사시켰던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이 1998년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후 다이앤은 미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죽을 권리’와 존엄사 지지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WP는 평가했다.

다이앤은 남편이 죽은 뒤 비영리단체 ‘연민과 선택’과 존엄사 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1997년 오리건 주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법으로 인정하도록 만든 바버라 쿰스 리 씨가 운영하고 있다. 다이앤은 이 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에 등장해 남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의회에서 존엄사 청문회가 열리면 참석해 증언할 생각이다.

존엄사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중병 환자들이 원하는 시간에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병원이 약물 처방 등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주사하는 안락사와 달리 환자가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죽음을 맞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을 시작으로 워싱턴(2009년), 버몬트(2013년) 등 3개 주에서만 존엄사가 합법화된 상태다. 지난해 11월 1일에는 악성 뇌종양 선고를 받은 29세 여성 브리타니 메이너드 씨가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 주로 이사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를 계기로 메릴랜드 뉴욕 플로리다 캔자스 위스콘신 워싱턴에서 입법이 논의되고 있다.

존엄사 합법화에 반대하는 천주교와 미국의료협회(AMA)는 미국 전역에서 정치적으로 열성적인 청취자가 260만 명이나 되는, 영향력 있는 다이앤이 존엄사 지지 운동을 벌이는 것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다이앤은 남편을 따라 자신도 능동적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남편처럼 자신의 시신을 조지워싱턴대 의대에 실험용으로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주치의에게 “내가 죽을 때는 꼭 도와 달라”고 요청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놓았다. WP는 “낙태와 동성결혼에 이어 존엄사 허용 문제가 미국 사회의 거대 논쟁거리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남편#존엄사#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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