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미대사-미국 주한대사 가장 큰 차이점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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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60주년]
역대 주미 한국대사 - 주한 미국대사 45명 전원 프로필 심층분석
주미대사 7명 총리 지내… 주한대사는 19명이 전문외교관

《 5·16군사정변으로 물러난 장면 총리는 미국과 유엔의 6·25전쟁 파병을 이끌어낸 초대 주미 대사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찾아가 “계엄을 선포할 경우 한미동맹을 훼손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이는 14대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였다. 한국의 주미 대사와 미국의 주한 대사는 이처럼 한미 외교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동아일보 정치부는 한미동맹 60년을 맞아 역대 주미 대사 23명, 주한 대사 22명 등 총 45명의 ‘모든 것’을 처음으로 조사 분석했다. 》  

‘1987년 6월 나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얘기하며 “계엄을 선포하면 한미동맹을 훼손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최광수 외무장관은 내게 전화로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줬다.’

1986∼1989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 전 대사의 회고록 중 ‘6월 민주화 항쟁’과 관련된 내용이다. 릴리 대사 이외에도 많은 미국의 주한대사는 서울에서, 한국의 주미대사는 워싱턴에서 양국의 외교 최전방을 지켜왔다.

양국 대사는 한미 외교의 야전사령관이다. 둘은 닮은 듯 달랐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Korea Foundation)과 동아일보 정치부가 최근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역대 주미대사 23명, 주한대사 22명 총 45명의 프로필을 처음으로 심층 분석한 결과가 그랬다.

이들 45명의 면모를 살펴보면 한미동맹 60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정치적 주미대사, 전문적 주한대사

1948년 유엔이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이후로 주미대사 24대 23명(정일권 대사는 3·5대), 주한대사 22명이 워싱턴과 서울 외교가를 누볐다.

주미대사의 출신 대학은 서울대가 8명(34.8%), 주한대사의 최대 동문은 예일대(6명·27.2%)였다. 대사로 부임할 당시 평균 나이는 주미대사(56.0세)가 주한대사(53.7세)보다 2.3세 더 많았으나 50대 중반이 대사의 적령기임을 알 수 있다. 재임기간도 주미대사가 2년 8개월, 주한대사가 2년 10개월로 비슷했다. 그러나 임기 2년도 채우지 못한 경우는 주미대사가 8명으로 주한대사(4명)의 2배였다. 주미대사의 이런 불안정성은 그 출신 성분과도 무관치 않다. 주미대사 23명 중 임명 직전의 직책 기준으로 외교관은 10명(43.5%)으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주미대사 부임 전 장관(5명)이나 국무총리(3명)를 지낸 고위 정무직 인사 출신만 8명(34.8%)에 달했다. 주미대사 재임 전후로 총리(내각수반 포함)를 지낸 사람만도 총 7명(30.4%)이다.

반면 주한대사는 22명 중 무려 19명(86.4%)이 정통 외교관 출신. 외교부 당국자는 “주미대사는 미국 정부보다 본국(한국) 정권과 소통이 쉬운 정무직 인사가 많이 기용돼 정치 상황이나 인사 필요에 따라 임기가 들쑥날쑥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주한대사는 대부분(18명·81.8%) 2년 이상의 임기를 보냈다. 최단명 대사는 3대 윌리엄 레이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거만한 태도 등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외교 관례상 매우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에 대사 교체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 역사의 현장에서 고뇌했던 양국 대사들

주한대사는 한국의 근대사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1980년대 이후 주한대사의 큰 고민 중 하나는 ‘반미정서’였다. 제임스 릴리 대사(1986∼1989년)는 반미시위대로부터 여러 차례 ‘인형 화형식’을 당했다. 도널드 그레그 대사(1989∼1993년)는 야밤에 시위대가 관저로 침입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2002년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 이후 고조된 반미감정을 직접 목격한 토머스 허버드 대사(2001∼2004년)는 “사건 직후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강력히 요청해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회고했다.

대한민국이 6·25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고비마다 주미대사들도 열심히 뛰었다. 초대 장면 대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6·25전쟁 소식을 접하고 미 국무부와 유엔본부 등을 찾아다니며 미군과 유엔군의 파병을 호소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당시 주미대사는 김경원 대사였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친서’를 백악관에 요청했다. 한국 정부가 친서를 중간에 가로챌 것을 우려한 김 대사는 릴리 주한대사에게 ‘친서를 외무부를 거치지 않고 청와대로 직접 전달하라’고 미 측에 조언했다.

한 전직 주미대사는 “‘강경한 한국 정부’와 ‘온건한 미국 정부’ 사이에서 ‘낀 신세’가 됐다가, 정권이 바뀌면 반대로 ‘온건한 한국’과 ‘강경한 미국’ 간의 신경전을 조율해야 했다”며 “그것이 주미대사의 숙명”이라고 토로했다.

○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국 대사의 역할

21세기 들어서 한미 사이에서는 안보동맹뿐만 아니라 경제 협상 또는 다자외교 무대에서의 협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경제 관료로 잔뼈가 굵은 한덕수 전 총리는 2009년 주미대사에 부임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최근 주한대사의 임명에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가 부임한 데 이어 현직 대사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성 김 대사다. 이는 9·11테러 이후 주재국의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하는 ‘공공외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전략과 맞닿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최근에는 정부간 현안을 각국 정상이 직접 챙기거나 다양한 접촉 채널이 있어 대사가 직접 관여하는 일이 줄었다”면서 “대신 본국의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공공외교나 대민 접촉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한미동맹#60주년#한국대사#미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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