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주애진]“5년전 언론인 피살 규명을”… 이스탄불 뒤덮은 카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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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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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진 국제부
주애진 국제부
“우리는 모두 딩크다.”

빨간 카네이션을 든 수만 명의 시민들이 19일 터키 이스탄불 중심가로 모였다. 터키에서 발행되는 아르메니아계 격주간지 ‘아고스’의 사무실 앞이다. 5년 전 아고스의 편집장이던 터키 언론인 흐란트 딩크가 총격으로 사망한 장소다.

딩크는 오스만제국이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학살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뒤 이에 불만을 품은 17세 소년 오군 사마스트에게 살해됐다. 딩크 사망 5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이날 행진에는 90세가 넘은 터키의 유명 작가 베다트 투르칼리도 참가했다.

최근 딩크 사망에 연루된 19명의 피고인에 대한 터키 법원의 판결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딩크를 저격한 사마스트는 2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법원은 딩크의 죽음이 극우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암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가 딩크 암살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다는 점도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 후 많은 터키 지식인들은 “우리는 정의를 요구한다”고 외쳤다. 딩크 사망이 극우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암살이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터키 정부는 진실 규명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 터키인에게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은 잊고 싶은 과거다. 역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50여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이에 대해 숫자가 부풀려졌을 뿐 아니라 의도적인 학살이 아닌 역사적 혼란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터키 내 양심적 지식인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8년에는 대학교수, 작가, 언론인, 예술가 등 200여 명이 나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사과성명을 내는 등 서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하루 만에 2500명이 동참하는 등 높은 호응을 얻었다.

딩크의 사망 5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붉은 카네이션은 터키의 살아 있는 양심이자 아름다운 용기다.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추모행렬은 여전히 과거사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는 나라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애진 국제부 ja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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