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사망]27세 대위때 무혈 쿠데타로 권좌 올라… 세계 최장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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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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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다피 누구인가

열혈 청년서 냉혈 독재자로 1969년 쿠데타 직후의 무아마르 카다피(왼쪽)와 2006년 독재체제가 공고했던 시절의 모습. 동아일보DB
열혈 청년서 냉혈 독재자로 1969년 쿠데타 직후의 무아마르 카다피(왼쪽)와 2006년 독재체제가 공고했던 시절의 모습. 동아일보DB
독특한 언행으로 이목 집중 1986년 1월 트리폴리 인근 베두인 천막에서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는 카다피(왼쪽). 오른쪽은 2009년 6월 이탈리아 로마 방문 때의 모습. 로이터AFP 연합뉴스
독특한 언행으로 이목 집중 1986년 1월 트리폴리 인근 베두인 천막에서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는 카다피(왼쪽). 오른쪽은 2009년 6월 이탈리아 로마 방문 때의 모습. 로이터AFP 연합뉴스
2009년 7월 9일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확대정상회의에서 만난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리비아 국가원수(왼쪽)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라퀼라=로이터 연합뉴스
2009년 7월 9일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확대정상회의에서 만난 무아마르 카다피 당시 리비아 국가원수(왼쪽)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라퀼라=로이터 연합뉴스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생포 또는 체포작전 도중 다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에 따라 리비아 내전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올해 초만 해도 리비아를 42년간 통치한 절대 권력자 카다피가 초라한 신세로 권력을 잃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1969년 27세에 친(親)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좌에 오른 육군 대위 카다피는 당시엔 혁명가의 면모가 강했다. 전 세계에서 최장수 국가원수 자리를 지켜온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자였던 전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를 ‘롤 모델’로 삼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다.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고 독특한 형태의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전제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부족 간 알력이 극심했던 리비아를 하나로 묶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아랍의 나폴레옹’(카다피 평전)을 꿈꿨던 그의 야심은 극심한 중앙집권적 철권통치로 처음부터 삐걱댔다. 석유를 비롯한 주요 산업의 국유화는 자신의 수족만 배불리는 부패로 이어졌다. 인근 이집트 튀니지 등과 ‘대이슬람 연맹’ 구축을 꾀했지만 미국 등과 사이만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올 4월 10일 트리폴리에서 자동차에 탄 채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카다피. 당시 연합군의 공습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는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리폴리=로이터 연합뉴스
올 4월 10일 트리폴리에서 자동차에 탄 채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카다피. 당시 연합군의 공습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는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트리폴리=로이터 연합뉴스
카다피가 통치한 지난 40여 년간 리비아는 각종 테러는 물론이고 반미(反美) 무장단체 지원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1985년 이탈리아 로마와 오스트리아 빈의 동시 테러와 1986년 독일 베를린 나이트클럽 폭발을 주도했다. 특히 1988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이 탑승한 미국 팬암기를 폭파시켜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중동의 미친 개”라는 비난까지 듣기도 했다.

2003년에는 팬암기 사건 유족에게 보상을 약속하는가 하면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하며 서방과의 ‘화해 무드’에 돌입했으나 리비아와 국제사회 사이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또 2009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리비아 유전 개발과 관련한 영국 기업의 로비설에 휩싸인 채 팬암기 폭파 사건 피의자를 석방해 미국이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아랍권마저 부담스러워했던 냉혈한 독재자는 기이한 사생활이 드러나며 점점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각인돼 갔다. 피격을 겁내 1층 숙소만 고집했으며, 해외에선 건물이 무너질까 봐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2007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났을 땐 계속 파리채를 휘둘러 댔는가 하면, 2009년 유엔에서는 할당된 연설시간 15분을 넘기고 1시간 반 동안 “나는 왕 중의 왕” 같은 황당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미모의 미혼여성으로 구성된 ‘아마조네스 경호대’를 항상 동반했으며, 여성 편력도 꽤 심했다.

카다피가 두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7남 1녀 역시 아버지의 비호 아래 달콤한 권력을 맛봤다.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39)은 카다피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국가적 주요 대외업무를 담당했다. 지난해 10월 리비아 구치소에 억류됐던 한국인 선교사의 석방에도 깊숙이 관여했던 그는 아버지와 달리 ‘협상 가능한’ 이미지를 구축하며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축구선수였던 삼남 알사디(38)는 국가축구협회를 이끌며 리비아를 대표하는 스포츠 외교관으로 행세했다.

리비아 올림픽위원장인 장남 무함마드(41)는 전면에 나서진 않았으나 우편 및 통신위원회 등 굵직한 이권을 장악해왔다. 국가안보보좌관이던 4남 무타심(37)과 정보기관에서 활동했던 5남 한니발(36), ‘카미스 여단’을 이끌던 막내 카미스(29) 모두 막강한 실세였다. 5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6남 사이프 알아랍은 외국에서 주로 생활했고, 딸 아예샤(33)는 병원 등을 운영해 비교적 권력과 거리를 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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