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앵거]<上>박현진 특파원 ‘월街 시위’ 1박2일 참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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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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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래를 빼앗겼다” 자본주의 심장 월街 ‘분노의 해방구’

성조기에 별 대신 기업로고 그려놓고 ‘전쟁’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 모인 시위대. 성조기별 대신 나이키 씨티은행 맥도널드 등 기업 로고를 그려놓고 ‘WAR(전쟁)’라고 적은 깃발이 보인다. 미국에서 청년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 3일부터는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뉴욕=신화통신 연합뉴스
성조기에 별 대신 기업로고 그려놓고 ‘전쟁’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 모인 시위대. 성조기별 대신 나이키 씨티은행 맥도널드 등 기업 로고를 그려놓고 ‘WAR(전쟁)’라고 적은 깃발이 보인다. 미국에서 청년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 3일부터는 노동자들까지 가세한다. 뉴욕=신화통신 연합뉴스
굉음과 함께 여명이 밝았다. 바로 옆 월드트레이드센터(WTC) 신축 공사 현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초겨울 같은 날씨 속에 침낭 하나로 공원 콘크리트 바닥에서 밤을 새운 젊은이들은 부스스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한쪽에는 의약품, 생활필수품, 담요가 쌓여 있고 갖가지 주장을 담은 피켓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걸어 다닐 공간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위대가 지난밤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 족히 100명은 넘어 보였다.

3일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의 아침은 이렇게 밝아왔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대가 17일째 철야농성을 이어온 현장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가 인근에서 펼쳐진 이 같은 진풍경은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다. ABC, 폭스뉴스 등 주요 방송의 중계차량들과 방송진행자들이 아침부터 부산히 움직였다. 300여 m²의 넓지 않은 공간은 일종의 ‘해방구’로 보였다. 한 경찰관은 “시위대들이 경찰의 요구사항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이곳에만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언제 가두시위에 나설지 몰라 다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진화하는 시위…“참을 수 있는 한계 넘었다”

시위대원들은 3일 새로운 형태의 시위를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노동자단체와 연대시위를 이날 벌이기로 한 것. 오후 4시 뉴욕 시 최대 공공부문 노조인 ‘DC37’과 뉴욕시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5시 반에는 세계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 직원들과 함께 직원들을 해고한 소더비를 항의 방문하는 데 이어 6시에는 노동자단체들과 토론을 벌인다.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면서 휴가를 내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세라 마신 씨(24)는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먼로칼리지 2학년인 제이슨 마자 씨(20)는 일주일째 수업을 마친 뒤 밤마다 이곳을 찾는다. 그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며 “미국 시민들이 금융자본의 부정부패와 정치인의 실정에 더는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참전 반대, 여성인권, 이민정책 등 여러 이슈에 대한 토론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침체된 경제와 희망을 던져주지 못하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라고 말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도 주요 이슈다. 시위대들은 스스로를 ‘우리는 99%(We are the 99%)’라고 부른다. 이제 1% 부유층의 부정부패와 탐욕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 ‘중동의 봄’을 재연하려는 그들

긴밤 지새우고… 주코티 공원의 아침 시위대와 밤을 새우며 대화를 나눈 박현진 특파원(오른쪽)이 3일 주코티 공원에서 한 시위대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긴밤 지새우고… 주코티 공원의 아침 시위대와 밤을 새우며 대화를 나눈 박현진 특파원(오른쪽)이 3일 주코티 공원에서 한 시위대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일요일인 2일 오후부터 시위대와 함께하면서 몇 명에게 “리더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선뜻 답을 못했다. 매일 오후 두 차례씩 열리는 총회에는 사회자가 매번 바뀐다. 2일 오후 6시에 시작된 ‘총회(General Assembly)’ 사회도 자원자가 맡았다. 총회 운영도 특이하다. 사회자를 중심으로 시위대원들이 둘러앉은 뒤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마이크 체크’를 외친다. 확성기 사용이 금지돼 있어 마이크 체크를 외친 시위대원이 얘기를 하면 옆 사람이 발언 내용을 한 문장씩 끊어 주위에 앉은 동료들에게 릴레이식으로 전달하는 ‘인간 확성기’ 형태로 진행된다.

친구와 함께 철야농성을 벌이는 마이크 폴머 씨(26)는 연일 구호를 외쳐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그는 “이것이 민주주의다. 리더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연대(solidarity)를 바탕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이 우리의 강력한 무기”라고 말했다. ‘월가를 점령하라’ 홈페이지는 이같이 SNS를 활용한 시위 확산을 ‘아랍의 봄 전술(Arab Spring Tactic)’로 묘사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SNS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미국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다.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여성인권운동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래리 바이스 씨(28·여)는 이틀 전 텍사스에서 날아와 침낭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출근길에 시위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리치 알리아 씨(46)는 “나만 해도 3개월 만에 실업상태에 있다가 오늘 다시 출근하는 첫날이다. 실업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를 것이다. 미국은 매우 망가져 있다”고 말했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 글로벌 앵거 ::


런던을 불태운 영국의 폭동, 빚더미 정부에 화가 난 그리스 시민들, 가톨릭 국가 스페인에서 일어난 교황 방문 거부시위, 공교육 현실에 분노한 칠레 시위, 고물가를 못 견뎌 뛰쳐나온 이스라엘 시민들, 자본주의 심장부 월가의 시위…. 최근 지구촌을 달구고 있는 시위의 바탕에는 ‘분노’가 있다. 무역 자본 자유화에 따라 재화 서비스 노동 아이디어가 빠르게 이동하는 ‘세계화’라는 양지 한 편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독버섯처럼 자라난 양극화, 부의 집중, 청년실업이 부른 ‘분노(anger)’가 지구적(global) 현상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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