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후 10년, 삶이 달라진 사람들]<4>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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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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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 아들은 이재민 돕자는데, 난 9·11때 뉴욕이 받은 도움 잊고 살다니…”“9·11은 봉사의 날” 미국 아픔에 눈뜬 월가맨

제프 파네스 씨(오른쪽)는 9·11테러 이후 뉴욕 시민들이 미국 시민들에게 받았던 위로를 다시 미 전역에 전하자는 봉사정신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5월 ‘CNN 히어로’로 뽑히기도 했다. 부인, 두 아들 에번스(인형 들고 있는 아이), 조시와 함께 2003년 11월 샌디에이고 시 산불 이재민들에게 보낼 장난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 출처 야후뉴스
제프 파네스 씨(오른쪽)는 9·11테러 이후 뉴욕 시민들이 미국 시민들에게 받았던 위로를 다시 미 전역에 전하자는 봉사정신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5월 ‘CNN 히어로’로 뽑히기도 했다. 부인, 두 아들 에번스(인형 들고 있는 아이), 조시와 함께 2003년 11월 샌디에이고 시 산불 이재민들에게 보낼 장난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 출처 야후뉴스
5월 토네이도로 116명이 사망하고 도시의 40%가 폐허가 된 미시간 주 조플린 시. 이곳 어린 학생들과 주민들은 9·11테러 10주년이 되는 11일 특별한 손님을 맞는다. 다름 아닌 9·11 때 소방관과 복구 건설인력으로 참여했던 100여 명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다. 이들은 모두 자선단체 ‘뉴욕은 당신이 고맙습니다(New York Says Thank You)’의 회원.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제프 파네스 씨(45)는 한때 맨해튼에서 잘나가던 벤처캐피털리스트였다. 9·11 때 친구들과 비즈니스 파트너를 잃은 뉴요커인 그는 미 전역에서 보내온 국민들의 성원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지인을 잃은 슬픔도, 감사의 마음도 바쁜 일상 속에 금방 잊혀져 갔다. 그러던 2003년 11월, 엉뚱한 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9·11테러는 미국민에게 크나큰 상처였지만 당시 뉴욕 시민들이 받았던 도움의 손길은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고 있다. 토네이도로 붕괴된 건물 재건 작업을 하고 있는 ‘뉴욕세즈생큐’ 자원봉사자들. 뉴욕세즈생큐재단 제공
9·11테러는 미국민에게 크나큰 상처였지만 당시 뉴욕 시민들이 받았던 도움의 손길은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고 있다. 토네이도로 붕괴된 건물 재건 작업을 하고 있는 ‘뉴욕세즈생큐’ 자원봉사자들. 뉴욕세즈생큐재단 제공
시작은 5세 난 아들 에번스였다. 당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산불을 TV로 보던 아들이 “저 친구들에게 내 장난감을 가져다주고 싶다”고 졸랐다. 아들의 기특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다 문득 9·11 당시 자신을 포함한 뉴욕 시민들이 받았던 도움이 떠올랐다. 그는 이웃들의 장난감과 생필품을 모아 트럭에 싣고 친구 2명과 함께 샌디에이고로 향했다. 그때 트럭에 내건 현수막이 ‘뉴욕은 당신이 고맙습니다’였다. 그 일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벤처캐피털리스트 일도 프리랜서로 바꾸고 매년 9월 11일이 되면 그해 재해로 고통을 받는 지역을 찾아가 돕고 재해로 파손된 건물들을 재건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받은 도움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의 ‘페이 잇 스루(Pay it through)’ 정신에 함께하는 이 단체 자원봉사자들이 7년간 7000명에 달한다.

9·11테러 직후 건설 인부들이 구조요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라운드 제로가 내려다 보이는 맨해튼 90번가 건물에 걸어놓았던 초대형 성조기가 3년 만에 복원돼 11일 9·11 박물관에 전시된다. 뉴욕세즈생큐재단 제공
9·11테러 직후 건설 인부들이 구조요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라운드 제로가 내려다 보이는 맨해튼 90번가 건물에 걸어놓았던 초대형 성조기가 3년 만에 복원돼 11일 9·11 박물관에 전시된다. 뉴욕세즈생큐재단 제공
파네스 씨는 5일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며 “아들의 말이 시작이었지만 결국 9·11이 나의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조플린 시 행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토네이도 당시 동물 75마리와 장애인, 어린이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농장 건물도 다시 짓는다.

9·11 1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이와 별도로 특별한 행사도 기획됐다. 지난 3년 동안 이 단체가 주도해 49개 주 수만 명이 한 땀 한 땀씩 바느질로 기운 초대형 미국 국기가 9·11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것. 가로 10m, 세로 5m에 이르는 이 국기는 9·11 당시 건설 인부들이 구조요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라운드제로가 내려다보이는 맨해튼 90번가 건물에 걸어놓았던 것. 찢어진 이 국기를 보관하고 있던 당시 현장 건설감독이 이 단체에 2008년 기증한 이후 미 전역에서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파네스 씨는 “한 땀씩 바느질을 하면서 9·11을 계기로 물결쳤던 봉사와 희생정신을 기리자는 의미다. 모두 3000여 개 조각이 덧붙여졌으며 진정한 미국의 틀(The fabric of America)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9·11테러는 한쪽에서 분열된 미국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또 한쪽에서는 미국인들을 이처럼 하나로 묶어줬다. 전쟁과 테러는 남의 일이라 여겼던 미국인들이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물결이 9·11 이후 자연스럽게 생겼다.

뉴욕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9·11 때 남동생을 잃은 콜린 켈리 씨는 유가족들이 만든 평화운동단체 ‘평화로운 내일(Peaceful Tomorrow)’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설립된 이 단체는 200여 유가족과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반전 및 반테러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켈리 씨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9·11을 겪으면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 때 지구상 다른 어떤 곳에서는 전쟁과 테러로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역시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데이비드 포터티 씨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지키기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단체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9·11테러로 상처를 입은 도시에서 평화행진을 벌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욕설을 퍼붓거나 험악한 인상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 단체는 앞으로 더욱 보폭을 넓혀 미국 사회 내 반이민 정서를 깨뜨리는 일까지 할 계획이다.

남편과 함께 미 육군에서 부부 원사로 근무했던 데버러 스트릭랜드 씨의 삶 역시 9·11 이후 바뀌었다. 남편은 제대를 불과 한 달 앞두고 9·11테러로 사망했다. 스트릭랜드 씨는 충격에 군 생활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 대신 두 번씩이나 아프가니스탄 자원 근무를 하면서 죽은 남편의 삶에 동참했다. 그는 야후가 운영 중인 9·11 메모리얼 사이트를 통해 “남편의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진정 남편의 삶과 함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분노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9·11로 숨진 군인 유가족을 돕는 국립 9·11 펜타곤메모리얼 펀드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정신건강협회 에이프릴 내추럴 국장은 “9·11은 미국인에게 큰 상처였지만 이제는 어떻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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