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충격’ 일본이 변했다]무능총리 재계에 무시당하고… 경쟁 기업끼리 ‘생존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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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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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① 日 주요 경제단체장들, 총리 주재 전략회의 보이콧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 후 일본 사회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정권과 관료, 재계가 찰떡궁합처럼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나라를 이끌던 ‘철의 트라이앵글’이 깨지는 것이다.

정권과 관료의 리더십 부재와 무능을 확인한 재계는 최근 들어 드러내놓고 총리와 정부를 성토하고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볼 수 없던 일이다.

정치권 비판의 선봉은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경단련(經團連)의 요네쿠라 히로마사(米倉弘昌) 회장이다. “국회의원은 봉급 도둑이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날리는 인물이다. 그는 3일 총리관저에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주재한 신성장전략실현회의를 보이콧했다. 5차례 연속 펑크다.

경제동우회의 하세가와 야스치카(長谷川閑史) 대표간사도 이날 불참했다. 대표적 경제단체장들이 빠지며 회의가 겉돌았지만 총리를 비롯한 정권 핵심인사나 고위관료 누구도 재계를 비난하지 못했다. 그만큼 힘이 빠진 것이다. 경단련에서는 “간 총리가 8월 중순까지도 물러나지 않으면 정부의 모든 회의에서 경제계 대표가 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요네쿠라 회장은 지난달 중순 정부의 원전대책이 오락가락하자 “정부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생각할 수도 없는 바보 같은 이야기다”라며 “국민이 안심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할 정부가 스스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며 몰아붙였다.

하세가와 간사는 국회해산설이 나돌던 지난달 초 “총선거는 말도 안 된다”며 “국민과 정치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재계의 비판에도 정치권이 정쟁에만 몰두하자 한 세미나에서 “현재 정치상황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지만 비판해도 효과가 없으니 이제 그만하겠다”며 비아냥댔다. 간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밝힌 ‘탈(脫) 원전 선언’에 대해서도 “단기간에 될 것처럼 오해하도록 설명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분별없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상공회의소의 오카무라 다다시(岡村正) 회장도 “여야가 협력해 복구대책을 조속히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일본 재계는 그동안 총선 때 정당공약에 점수를 매겨 지지 정당을 결정하거나 국가적 이슈에 의견을 가끔 내왔다. 하지만 최근처럼 일제히, 또 노골적으로 정부와 정치권을 비난하는 적은 없었다. 과거 자민당 정권 시절에는 정권이 친기업 정책으로 재계를 밀어주고, 재계는 정치자금을 몰아줬기 때문에 서로 비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운명공동체였던 것이다.

정경유착을 비난해온 민주당 정권 출범 직후엔 재계가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정권의 실정이 거듭되고 여론이 등을 돌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대지진과 원전사고 후 정권과 관료가 무능함을 드러내자 노골적 비판이 시작됐다.

최근 정치권과 정부에 대한 비판에는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장만 나서는 게 아니다. 개별 기업 경영자들도 매운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대지진 이후 정부의 차관급 인사와 트위터로 격하게 말싸움을 하는 등 정부에 잇따라 쓴소리를 하고 있다.

마스코 오사무(益子修) 미쓰비시자동차 사장은 얼마 전 “나랏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봐야 안 된다.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고바야시 요시미쓰(小林喜光) 미쓰비시화학 사장은 “어떻게 하면 강한 리더십이 생겨날까. 선거제도 등을 재검토해야 한다”며 정치개혁을 주문했다. 음료업체인 이토엔(伊藤園)의 혼조 다이스케(本庄大介) 사장은 “총리는 자리를 연명하려는 것 같다. 정치가 꽉 막혀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재계의 거친 비판에 반론조차 못 펴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무능과 불신의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속돼온 일본 정·재계 역학구도와 상호관계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장면 ② 원전 플랜트기업 히타치제작소-미쓰비시중공업 경영통합 추진


일본을 대표하는 원전 플랜트 메이커인 히타치제작소와 미쓰비시중공업이 경영통합에 나선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내에서 원전 포기론이 대세를 형성하자 두 회사가 힘을 합쳐 불확실성에 공동 대처하기로 한 것이다. 두 회사는 고속철과 신재생에너지 등 사회인프라(SOC) 사업과 정보기술(IT) 등 차세대 성장산업도 통합해 선택과 집중 효과를 노릴 계획이다.

4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두 회사는 2013년 4월 경영 통합을 목표로 협상을 시작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일방적으로 인수하는 기업 인수합병(M&A)과 달리 지분을 절반씩 출자해 제3의 회사를 만들어 사업을 합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통합회사는 화력발전과 원전 등 발전플랜트와 고속철, 신재생에너지, IT시스템 등을 망라한 친환경적 종합인프라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두 회사의 경영통합은 전후 일본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일본의 간판 제조업체 간의 합병이다. 히타치는 일반 가전부터 발전 플랜트, 전력 IT시스템에 이르기까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갖춘 일본 최대의 전기종합메이커이다. 미쓰비시중공업 역시 발전플랜트, 항공우주산업, 조선 등 광범위한 사업 영역을 갖추고 있다.

두 회사는 경영통합을 통해 중복되는 사업을 과감히 털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비효율을 없애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연간 매출이 9조3158억 엔인 히타치와 2조9037억 엔인 미쓰비시중공업이 통합할 경우 연간 매출이 12조 엔대로 뛰어 도요타자동차에 이어 일본 제조업체 2위가 된다. 세계 인프라기업으로서는 미국의 GE와 독일 지멘스를 제치고 1위에 오른다.

두 회사가 경영통합에 나서는 것은 급신장하고 있는 신흥국의 인프라 시장과도 관련이 있다. 내수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일본 기업은 미래의 목표를 신흥국 시장개척에 두고 있다. 지금까지 각개격파식으로 개별수주에 나섰던 일본 기업 사이에서는 기술력과 자금력을 합쳐 해외시장 진출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두 회사는 원전 플랜트를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표방해왔으나 원전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거에 미운 오리로 전락해 사업 전략에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두 회사가 2000년에 제철기계 사업부문을 통합한 이후 철도사업과 수력발전설비 사업 등 공동사업을 하면서 경영통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확인한 것도 경영통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일본 언론은 두 회사의 경영통합이 일본 산업구조의 재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각각 높은 기술력을 갖춘 두 회사가 사업부문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견조정이 순탄하게 이뤄질지가 관건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 산업계는 두 기업의 경영 통합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관계자는 “현재 두 회사는 원전 개발방식이 다르지만 하나의 모델로 통일해 시너지를 내면 국제 수주전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미쓰비시는 프랑스 아레바와, 히타치는 미국 GE와 각각 원전 파트너십을 맺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공작기계와 인프라 분야에서 분명히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장면 ③ 정치권, 간 총리 대표공약 ‘자녀수당’ 폐지 합의

일본 민주당 정권의 대표 공약이자 ‘퍼주기 정책’의 상징이었던 자녀수당이 폐지된다. 민주당과 자민당, 공명당은 4일 각 당 간사장과 정책조사회장이 참석한 ‘여야 6인회의’를 열고 내년 4월부터 자녀수당을 폐지하는 데 합의했다. 그 대신 자민당 정권 때의 정책이었던 아동수당을 부활시켰다.

3당 합의서에 따르면 현재 중학생까지 일률적으로 1인당 월 1만3000엔씩 지급하는 자녀수당이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는 3세 미만 1만5000엔, 3세∼중학생은 1만 엔으로 바뀐다.

내년 4월부터는 자녀수당은 없어지고 아동수당이 지급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올해 말까지 만들 예정이다. 현재로선 연간 수입 960만 엔 이하 가정만을 대상으로 1인당 9000엔 정도를 지급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이번 합의의 요점은 민주당 정권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자녀수당’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수당 지급에 소득제한을 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자녀수당은 2009년 8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제시했던 핵심 복지공약으로 서민들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당 집권 후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고 야당은 “가뜩이나 적자예산인데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임원 등 고소득자에게까지 자녀수당을 주는 것은 예산 낭비”라며 폐지를 요구해왔다.

민주당은 “자녀수당은 당의 정체성과 직결된다”며 끝까지 버텼지만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피해 복구 관련 예산지출이 대폭 늘면서 두 손을 들었다.

원래 민주당의 자녀수당 공약은 중학생까지 1인당 2만6000엔을 주는 것이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첫해에 한해 절반인 1만3000엔을 지급해왔고 결국 한 번도 100% 지급을 하지 못한 채 폐지되게 됐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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