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긴축 채찍질에 상아탑 비명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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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지원금 80% 줄일 계획… 일류 교수 해외로 떠나고 철학 등 기초학문 밀려나

“정부의 재정 감축 정책이 영국 교육의 앞길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스티브 스미스 영국대학연합회장)

영국 대학이 휘청거리고 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 ‘학문의 본고장’을 자처하던 영국 대학들이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운영에 심각한 빨간불이 켜졌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낮은 수업료와 질 높은 교육수준을 자랑하던 영국 대학이 돈에 발목 잡혀 하향평준화란 내리막길로 떨어질 운명에 처했다”고 전했다.

영국대학연합회에 따르면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는 향후 5년 이내에 현재 대학 지원금액을 80% 이상 삭감할 계획이다. 해마다 64억 달러(약 7조1200억 원)가량 지원하던 연구비도 16억 달러로 낮춘다. 공공지출을 40% 이상 대폭 줄이겠다던 정부의 방침이 그대로 대학 교육에 반영된 결과다.

1750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부채 감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정부 지원금이 전체 운영비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영국 대학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일부 대학은 벌써부터 ‘돈 안 되는’ 기초학문 분야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미들섹스대는 다음 학기부터 철학과를 없앨 예정이며, 웨일스 지역 명문인 카디프대는 현대 언어학부 교수진을 22명에서 10명으로 줄였다. 런던대 킹스칼리지는 영국 내 유일한 고문서 감정 학과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찬반양론에 휩싸였다.

실력 있는 교수 및 연구진의 해외 대학 유출은 더욱 심각하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인 에이드리언 오언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캐나다 웨스트온타리오대 이직은 영국 내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오언 교수는 “과학자들 사이에 영국에서 이제 더는 안정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자괴감마저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일류 연구진의 ‘엑소더스(대탈주)’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 지원 축소로 인한 수업료 인상도 문제다. 최근 영국의회 보고서는 “대학들이 재정삭감의 부족분을 채우려면 현재 자국 학생 기준 1인당 평균 5260달러(약 580만 원) 정도 내던 1년 학비가 최소 1만1000달러(약 1220만 원) 이상으로 뛰어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폴 코트렐 대학노조 정책국장은 “자국 학생은 물론이고 안 그래도 정부 지원이 없어 높은 수업료를 부담하던 해외 고급 유학생들이 학비가 더 오르면 다른 나라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한동안 잠잠했던 대학 사립화 논의도 다시 불붙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옥스퍼드대 관계자는 “정부 정책 변화에 흔들리지 않게끔 재정 자립을 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미스 회장은 “현 상황으로 볼 때 사립으로 바뀌면 살아남을 대학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뿐”이라며 “영국 대학 전체의 몰락은 일류 대학들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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