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강국, 그 경쟁력의 뿌리를 찾아서]<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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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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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디자인 공교육 ‘아트 프랑스’의 힘

국립 산업디자인 학교
학생에 연중 24시간 작업실 개방
학비, 사립의 10분의1도 안돼

파리 15구 ‘예술센터’
모든 시민에 골고루 혜택
탁아시설 기능도 겸해

프랑스 국립산업디자인학교(ENSCI)의 ‘아틀리에’로 불리는 강의실은 값비싼 기계와 신소재들로 가득하다. 학생들은 이 기계와 소재들을 마음껏 쓸 수 있다.
프랑스 국립산업디자인학교(ENSCI)의 ‘아틀리에’로 불리는 강의실은 값비싼 기계와 신소재들로 가득하다. 학생들은 이 기계와 소재들을 마음껏 쓸 수 있다.
《프랑스 국립산업디자인학교(ENSCI)의 1년 학비는 약 530유로(약 80만 원)다.
재료비까지 모두 포함된 비용이다.
연간 1000만 원을 훌쩍 넘는 사립 디자인학교 학비에 비해 상당히 저렴하다. 정부가 지원하는 산업디자인 전문 고등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이처럼 정부 주도로 ‘디자인 공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 학비 걱정 없는 학생들

ENSCI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 2년간 ‘프레파’라는 준비학교를 다시 거친다. 그만큼 입학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1차로 포트폴리오 심사와 서류 전형을 통과하면 하루 종일 걸리는 면접과 창의력 시험이 기다린다. 클립과 나무조각 등 특정 재료를 놓고 면접관에게 10분 안에 재료를 이용해 어떤 물건을 만들어낼지 설명하는 식이다. 재료를 표현해내는 능력은 물론 창의력까지 보는 시험이다. 수험생과 면접관 모두 사전에 재료에 대한 정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면접을 치른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뽑은 230여 명에게는 졸업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ENSCI에서 3년째 산업디자인을 공부 중인 김웅돈 씨(23)는 “13 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일단 뚫기만 하면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른다”면서 “프랑스에선 오후 6시면 대부분 문을 닫지만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연중 24시간 문을 열어둔다”고 말했다.

지난달 13일 방문한 학교는 강의실마다 3차원(3D) 작업 기계 등 값비싼 장비와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털실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재와 나무, 플라스틱 등 재료별로 구분된 강의실을 학생들은 ‘아틀리에(작업실)’라 부른다. 그래서 이 학교에는 ‘여러 개의 아틀리에’라는 뜻의 ‘레자틀리에(Les Ateliers)’라는 별칭이 붙었다. 학생들은 주어진 기기와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다. 직물 아틀리에에서 만난 루체 쿠이에 씨(25)는 “9월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중”이라며 “플라스틱 신재료인 ‘폴리아미드’를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비 라보 마스터과정 총책임자는 “ENSCI는 교육부가 아닌 산업부와 문화부로부터 예산을 받는 게 특징”이라며 “디자인이 예술과 산업의 한가운데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지원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재료비는 산학협동 기업들로부터 후원받는다. 매년 학교에는 디자인 협업을 제안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요청이 이어져 이를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을 정도다. 올리비에 에르트 교무부장은 “대부분의 회사는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실제 작품 제작에 참고한다”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80% 이상의 학생들이 취업에 성공해 일석이조”라고 설명했다.

○ 일반인에게도 혜택 주는 디자인 공교육

프랑스에서 디자인 공교육의 혜택은 전공 학생이 아닌 시민들에게도 골고루 돌아간다. 14일 찾아간 파리 15구의 ‘예술센터’는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파리 시에서 운영하는 이 센터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미술과 발레, 음악 등 100여 개에 이르는 예술과 디자인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레몽 레콩브 센터장은 “파리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며 “현재 최연소자는 발레를 배우는 두 살 어린이고, 최고령자는 조각이 취미인 97세 할머니”라고 설명했다.

현재 파리 시내 15개 구에 이와 같은 센터 45개가 마련돼 있다. 지역 특성에 따라 노인 인구가 많은 곳에는 노인용 교육 프로그램을, 신혼부부들이 많은 지역에는 유아용 프로그램을 주로 제공한다. 지역 내 학교들과도 연결돼 있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는 방과 후 센터를 찾아 전문 강사들로부터 보충 교육을 받는다.

이날 디자인 강의실에선 남녀 교사 두 명이 다섯 살 아이들 12명에게 신문지를 뭉쳐 인형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 리오넬 트레보아 씨는 “그림 전문교사 한 명과 조각 전문교사 한 명이 어린이 10여 명을 맡아 디자인과 미술 수업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이용료는 소득과 가족 인원수에 따라 8단계로 달라진다. 1주일 한 시간을 기준으로 연간 최저 73유로(약 11만 원)에서 220유로(약 33만 원)까지다.

레콩브 센터장은 “큰 비용 부담 없이 오후 10시까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어 특히 아이를 가진 맞벌이 부부들 사이에서 인기”라며 “아이를 맡아주고 디자인 교육까지 해주는 예술센터 덕에 최근 20여 년 사이 파리 출산율이 크게 올랐다는 평가까지 받는다”고 설명했다.
파리 시내 뒤수브 초등학교에서 2학년 학생들이 미술수업을 받고 있다.
파리 시내 뒤수브 초등학교에서 2학년 학생들이 미술수업을 받고 있다.
▼ 어린이 디자인 교육 세살 개성 여든까지… ▼

프랑스 정부는 2년 전 유치원(3∼6세)과 초등학교(7∼11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디자인 교육을 강화했다. 유치원 어린이들은 하루에 한 시간씩, 초등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시간 이상 디자인 실기를 배우고 미술의 역사 및 이론 교육을 받는다.

지난달 13일 오후 파리 뒤수브 초등학교. 점심시간을 마친 2학년 학생들이 미술실에 모여들었다. 이날 수업의 주제는 ‘곡선과 직선’. 교사 프랑수아 브리에 씨는 칠판에 걸린 종이에 구불구불한 선으로 호수를 그렸다. 이어 거침없이 그어나간 직선들은 나뭇가지가 됐다.

아이들의 탄성 속에 그림을 완성한 브리에 씨는 그림을 뒤집어 버렸다. 브리에 씨는 “학생들이 행여나 따라 그릴까봐 내가 그린 그림은 항상 치운다”며 “아이들마다 갖고 있는 개성과 스타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갱지와 몽당연필, 크레용 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펼쳐나갔다. 카이나 로니스 양(7)은 잎사귀를 크게 그리더니 검은색으로 칠했다. 이유를 묻자 “선생님 그림이랑 다르게 그려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오히아나 프리비아 양(7)은 “도움 없이 그리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마음대로 그리니까 당연히 더 쉽다”고 대답했다.

올리비에 미겔 교장은 “아이들에게 미술이나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주입하지 않는다. 디자인수업은 아이들이 각자 관찰한 것을 마음껏 표현해내는 시간이다”라고 설명했다.
빛으로 디자인한 리옹의 밤은 수도 파리로만 몰리던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축제가 시작된 1989년 이후 10년 동안리옹을 찾는 관광객은 약 25% 늘었다. 사진 출처 리옹빛축제 홈페이지
빛으로 디자인한 리옹의 밤은 수도 파리로만 몰리던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축제가 시작된 1989년 이후 10년 동안리옹을 찾는 관광객은 약 25% 늘었다. 사진 출처 리옹빛축제 홈페이지
▼ 밤에 활짝 피는 리옹… ‘빛의 도시’로 반짝반짝 ▼

‘뤼미에르(빛).’ 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리옹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다.

1989년 앙리 샤베르 당시 리옹시장은 공공디자인 정책으로 ‘도시조명계획’을 시도했다. 로마 유적 등 주요 기념물과 건물에 빔프로젝터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설치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무대’처럼 만드는 것. 5년간 시 예산의 1.5%를 투자하는 대규모 실험이었다. 알랭 길로 등 프랑스의 대표적 조명 디자이너들이 참가해 론 강을 중심으로 도심에 조명을 연출했다.

매년 12월 초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리옹 빛 축제’도 조명정책의 하나였다. 1800년대 유행하던 페스트를 이겨내고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던 오랜 전통을 계승한 축제다. 나흘간 이어지는 축제 기간에 밤마다 리옹 시는 현란한 색상과 문양의 빛으로 수놓아진다. 건물 외벽 전체를 하얀 새 떼 이미지의 빛이 뒤덮는가 하면 역동적인 바로크 건축 양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조명 기법도 시도된다.

매년 조금씩 업그레이드된 리옹의 밤은 도시 이미지를 크게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0년 사이 야경을 구경하러 리옹을 찾는 관광객은 약 25%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조명산업의 발달도 반가운 성과다. 리옹 시는 성공 경험을 살려 199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 조명기술을 수출했다. 쿠바의 ‘모로 요새’와 베트남 호찌민 시립박물관의 조명도 모두 리옹 기술자들의 작품이다.

최근 광주세계광엑스포 감독을 맡아 방한한 길로 감독은 지난달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시의 전통과 현대적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킨 것이 리옹 조명계획의 성공 비결”이라며 “리옹은 수도인 파리에 밀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인정하는 ‘빛의 수도’”라고 말했다. 정강화 건국대 공공디자인연구센터장은 “리옹은 디자이너들을 동원해 빛이라는 블루오션을 잘 활용함으로써 관광산업을 활성화했고 컨벤션 유치에서도 성과를 냈다”고 설명했다.

글·사진 파리=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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