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2〉정치와 행정 제도의 선진화

  • Array
  • 입력 2010년 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미국 의원들은 의장 허락받고 발언…“의제 벗어났다” 지적땐 중단

미국은…

“찬성 60표, 반대 39표.”

지난해 12월 24일 오전 7시경 미국 워싱턴 의사당. 미국민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을 열던 시간 의사당 내에선 한숨과 환호가 엇갈려 터져 나왔다. 건강보험개혁 법안이 상원 표결을 통과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이래 미국 사회를 양분시키다시피 했던 최대 쟁점 법안의 명운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지만 고함이나 욕설은 들리지 않았다. 열띤 반대토론을 벌였던 공화당 의원들은 일단 표결에 들어가자 의석수의 열세를 자인하며 결과에 승복했다. 앞서 11일 7일 치러진 하원 표결은 찬성 210표 반대 208표로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지만 역시 패자는 깨끗이 승복했다.

뉴질랜드는…

“국회 안에서 몸싸움을 한다고요? 여기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예전에 국회 밖에서 사적인 일로 싸운 의원들이 있었는데, 법정까지 가서 재판을 받고 잘못한 측이 공식 사과했어요.”

뉴질랜드 최초의 한국계 국회의원인 뉴질랜드 국민당 소속 멜리사 리 의원은 지난달 22일 오클랜드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뉴질랜드 의회는 스피커(의장)의 말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정치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치1번지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지만 곳곳에 권위가 손상당한 흔적이 엿보인다. 본청 2층 창문들은 지난해 3월까지는 활짝 여닫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윗부분만 살짝 열린다. 지난해 1월 야당 당직자들이 창문을 통해 진입한 사건 이후 국회 사무처가 창문을 교체했기 때문이다. 그후 전국언론노동조합 조합원 등이 창문 나사를 풀고 들어오자 나사 홈까지 막았다.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등 몸싸움과 욕설, 심지어 해머까지 난무했던 폭력의 현장들은 말끔히 수리되고 청소된 상태다. 하지만 2월 임시국회 첫날인 이날 열린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가 기존 여야 합의내용이 백지화되면서 파행하는 등 합의와 표결이 무시되는 운영 행태는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모습이다.



우리 정치가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견인차 역할은커녕 오히려 사회의 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는 데 의견을 달리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 후진적 의사결정 구조

한국 국회에선 “나의 주장이 지고지선(至高至善)”이라는 착각 아래 국민이 정해준 의석수를 무시한 채 물리력으로 의사결정을 좌우하려는 행태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 풍토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지난달 1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자 미국사회가 “건강보험개혁의 명운이 바뀔 수 있다”고 반응한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보궐선거에서 1석을 잃음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막을 수 있는 슈퍼 60석의 지위를 잃었고 이는 앞으로 표결에 부쳐질 상하원 합동법안의 통과 가능성을 매우 낮게 만들었다. 의석 1석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수결은 유럽에서도 의회 존립의 근본 조건이다. 소수가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는 어느 당도 과반을 구성하지 못하면 아예 선거를 다시 치른다. 그만큼 다수의 뜻은 결정적이다.

영국 하원의 일과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수요일 정오부터 30분간 진행되는 총리 질의응답이다. 하원의장 자리를 사이에 두고 여야가 정면으로 마주본다. 야당 의원은 총리의 답변에 자기 자리에 앉아 야유나 책상 두드리기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다. 의장이 앉아 있는 공간은 건널 수 없는 곳이다. 이 공간을 넘어가 상대당 의원의 표결을 막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7년 취임 후 많은 개혁 법안을 내놓았고 야당인 사회당은 사사건건 반대했지만 의회 통과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표적인 게 35시간 노동제의 폐지. 35시간 노동제는 사회당 당수 마르틴 오브리가 발의한 사회당의 상징 같은 법인 데도 2007년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이 사실상 이를 무효화하는 법을 표결에 부쳤을 때 사회당은 오로지 표결로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규칙준수-권위존중’의 정치

끝장토론-다수결 승복… 몸싸움 상상못해
獨, 의장 직권으로 무질서의원 30일 퇴출
폭력 앞에 무력한 한국 국회의장과 딴판


○ 권위 존중의 부재(不在)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의 격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는다. 영국 하원에서는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의장의 호명(naming)만 받아도 직무정지 동의안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본 의회는 모든 발언을 단상에서 하도록 규정하며 의장 허가 없이는 단상에 오를 수 없다.

미국 하원에서 의원들은 ‘의장님’이라고 발언신청을 해서 허락을 받은 후 발언할 수 있다. 토론 중인 의제에 대해서만 발언할 수 있고 인신모욕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의사규칙을 위반하면 의장은 주의를 주고 의원은 즉시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의장이 안건을 상정하거나 연설을 하는 도중에는 의원들이 회의장 안팎으로 돌아다닐 수 없다.

뉴질랜드의 리 의원은 “의장의 명령이나 경고를 따르지 않을 경우 단순한 경고, 퇴장 명령부터 7일간 의회 참석 불가, 1년간 월급 지급 중단까지 다양한 제재가 가해진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해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unruly) 의회’ 5곳 중 하나로 꼽힌 한국 국회는 의장이 사실상 사회권 밖에 없고 심각한 폭력행위에 대한 명시적인 제재규정이나 처벌규정이 없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정치학)는 “의장의 법안 직권상정 제도를 철폐하는 대신 의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원은 의정활동이 본업
선진국 ‘휴회기간’만 정하고 항상 일해
개회기간 정하는 한국 국회와 정반대
직무정지-징계의원에 세비 안주는 곳도

○ 일 안하는 의회


미국 의회는 회기를 정할 때 국경일이나 여름휴가 기간 등을 중심으로 휴회 기간을 공지한다. 영국 의회도 마찬가지다. 언제 회의를 열지 규정하는 한국 국회와 달리 선진국 의회는 언제가 ‘쉬는 날’인지를 규정한다.

뉴질랜드의 리 의원은 자신의 하루 일과에 대해 “의회가 열리는 화∼목요일에는 오전 6시에 출근해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의회에 참석하고 사무실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담당 상임위원회의 자료를 읽느라 새벽 2시를 넘길 때도 많다. 그는 “지역구 업무는 의회가 열리지 않는 월요일, 금요일에 처리하지만 많은 의원들이 주말도 없는 의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한국 국회는 9월 정기회와 2, 4, 6월 임시회 개회만 명시돼 있고 소집 요구가 있을 때 임시회를 열도록 돼 있다.

사실 한국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이 같은 문제점들은 그동안 전문가들이 수없이 제기해온 내용이다. 2008년 12월 국회제도개선자문위가 국회운영개선방안을 연구해 국회의장에게 제출했고 여야도 각기 국회선진화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당은 폭력방지와 질서유지에 초점을, 야당은 여당의 독선적 운영을 견제하는 방안에 중점을 두고 있어 국회개혁마저도 정쟁의 대상으로 변질되어버린 상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치인들도 잘 안다”며 “다만 스스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언론과 시민사회 등이 정치개혁을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오클랜드=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 김창준 前 美 연방하원의원 “한 -미 의회 이런 점이 다르다”

“주민투표로 공천 결정하고 다수당이 상임위 책임정치”



▽공천시스템=미국에서는 각 당의 상하원 후보를 해당 지역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공천 결정에 당 지도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창준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사진)은 “당에서 공천권을 쥐고 있는 한 의원들이 지역의 여론이나 이해보다는 당의 거수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수당의 상임위원장 독점=미국은 다수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직을 가져간다. 현재는 여당인 민주당이 16개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여당에게 책임정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야의 진지한 토론과 표결=김 전 의원은 “특정 안건에 대해 여야가 20시간 토론을 결정하면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은 분과위원회와 상임위원회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충분하게 토론한다. 이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더 수렴해 법안을 표결에 부쳐 통과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원 품위의 중요성=김 전 의원은 “미국 의회에서는 의원다운 행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고함을 치는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을 쓰는 경우도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 한국 ‘국가브랜드’ 조사해보니…
정책-제도, OECD 평균 이하


한국의 국격은 어느 정도 수준이고 제고 방안은 무엇일까.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와 삼성경제연구소가 작년 말 발표한 국가브랜드지수 모델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50개국 가운데 ‘실체’를 기준으로 하면 19위, 이미지 기준으로는 20위로 나타났다. 실체는 각국의 정치·경제·사회 관련 통계치 125개를 분석해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미지는 각국의 여론 주도층 1만3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실체 기준 1위는 미국, 이미지 1위는 프랑스였다.

부문별로는 경제와 과학·기술 부문은 실체와 이미지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교통·통신·생활 등 ‘하드 인프라(hard infra)’ △정책·제도 등 ‘소프트 인프라(soft infra)’ △자연환경·전통문화 등 ‘헤리티지(heritage)’ 항목에서는 실체와 이미지가 모두 OECD 평균 이하였다.

국가브랜드위원회는 국가브랜드 제고(提高)를 위한 5대 역점 분야로 △국제사회 기여 확대 △첨단 기술과 제품 홍보 △매력적인 문화·관광 △다문화 포용 및 외국인 배려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을 꼽았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