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떠도는 ‘新조선족’의 슬픔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中진출 기업 주재원들 불황에 직장잃고 빈털터리 방황

# 톈진의 54세 김모 씨 1992년 국내 전자부품업체 주재원으로 중국 톈진(天津)에 파견된 김모 씨(54)는 2003년 해고된 뒤 지난해까지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모회사가 자금난으로 다른 회사에 인수되면서 적자가 쌓인 중국 공장을 폐쇄한 것. 김 씨는 중국어에 능통하고 현지 사정도 밝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로 다른 진출기업들도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재취업에 실패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국내 부품소재 산업이 이미 침체돼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 상하이의 44세 이모 씨 1995년 국내 화장품업체의 상하이(上海) 주재원으로 온 이모 씨(44)는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수요가 확 준 데다 중국 근로자들의 인건비가 오르고 위안화마저 강세로 돌아서면서 중국 법인은 ‘골칫거리’가 됐다. 결국 국내 본사는 중국 생산시설의 가동을 중단하고, 이 씨를 비롯한 주재원들을 현지에서 한꺼번에 해고했다. 이 씨 역시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중국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회사를 상대로 법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 근로자도… 중국어 잘하지만 직장없어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살이

■ 기업들도… 한국으로 U턴 하고싶어도 수도권 규제등에 진퇴양난

중국에 진출했던 국내 기업들이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와 위안화 강세, 인건비 상승 등으로 잇달아 문을 닫으면서 직업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고 있는 한국 주재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중국 내에서 ‘신(新)조선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조선족이란 주재원이나 자영업자로 중국에 들어왔지만, 사업 실패로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 장기간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칭다오(靑島) 총영사관 관계자는 “중국인을 고용해 영세기업을 운영하다 최근 1, 2년 사이에 망하고 신조선족이 된 한국인들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현지 법인에 근무했던 한국인들이 신조선족으로 영락하고 있다면, 중국 진출 기업들은 국내로 돌아가고 싶어도 발이 묶여 결국 현지에서 폐업을 맞는 사례가 늘고 있다. 톈진한국상회 김흥수 사무국장은 “지난해 1∼5월에 회원사 중 폐업하는 기업은 1, 2개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벌써 15개에 이른다”고 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신노동법을 시행하면서 자국(自國) 내 모든 기업이 △각종 사회보장비를 임금에 포함시키고 △10년간 계약직 고용을 하면 종신고용으로 전환해야 하며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의무화했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노사 갈등이 점차 불거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조치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은 신노동법 시행 이전보다 30%가량 늘었다. 중국에서 의류공장을 운영하는 한 업체 대표는 “중국 근로자들의 임금이 10년 전 한국 돈 5만 원에서 현재 40만 원 수준으로 올라 매출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도 약 8%에 육박한다”고 전했다.

환율도 기업들의 적으로 돌아선 지 오래다. 2006년 말 1위안에 118.97원이던 원-위안화 환율은 올 들어 200원대를 넘어서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산업 고도화 차원에서 노동력 위주의 임가공업체에 대한 혜택을 줄인 것도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개방 초기에는 외자유치를 위해 외국 임가공업체들이 들여오는 설비나 원자재에 관세와 증치세(일종의 부가세)를 면제해줬다. 하지만 최근에는 면세 항목을 줄이거나 환급률을 낮추고 있다. 쑤저우(蘇州)에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A사 대표는 “시 정부가 고부가가치 첨단산업 위주로 외국 기업들을 선별해서 공업원구(국가산업단지)에 유치하도록 최근 정책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중국의 기업 환경이 악화되면서 일부 중견기업은 ‘U턴’을 고려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수도권 규제에 따른 인력수급 문제로 속만 태우고 있다. 올해 2월 경기개발연구원 김은경 박사의 현지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칭다오에 진출한 휴대전화 커넥터 생산업체 B사는 인건비 상승 등으로 U턴을 고민했지만 ‘인력수급’ 문제에 부닥쳐 결국 이를 포기했다. B사 대표는 “국내로 U턴을 하면 수도권 규제에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수도권을 벗어나면 인력을 구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푸념했다.

1996년 톈진으로 이전한 C전자는 국내에서 수도권 상수원 보호규제로 공장 증설이 힘들어지자 한국을 떠난 사례. C사 대표는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도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골머리를 앓았다”며 “인력수급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내로 못 돌아간다”고 못 박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각종 기업규제를 풀어 인력수급부터 해결해야 중국 진출 기업들의 U턴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민성 전국경제인연합회 연구원은 “정부가 수도권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일본 정부가 과감한 수도권 규제 개혁으로 자국 기업들의 U턴에 성공했던 사례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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