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서울→베이징… 성장을 향한 ‘44년간의 릴레이’

  • 입력 2008년 8월 20일 02시 59분


<<중국은 2008년 베이징(북경) 올림픽을 계기로 큰 날개를 펼쳤다. 공산당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도 미래에 대한 자신감에 넘친다. 하지만 중국의 앞날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1964년과 1988년, 우연찮게 20여 년씩 차이를 두고 올림픽을 개최한 도쿄(동경)와 서울을 비교하면서 베이징의 앞날을 가늠해 본다.>>

■ 도쿄-서울-베이징 올림픽 영향 비교해보니

韓-日 일시적 불황뒤에 고도성장시대 누려

中 ‘중화 부흥’ 기치 질적성장 토대 구축나서

공중도덕-환경오염문제 해결 노력도 엇비슷



올림픽을 연 시기에 세 나라는 모두 중산층이 두꺼워졌고 이들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올림픽은 이들에게 세계로 향하는 도약대가 됐다.

그 이후 일본은 최근 역동성을 잃고 있고 한국 사회도 성숙사회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사회 변화를 겪고 있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경제성장과 사회주의 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미증유(未曾有)의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도쿄에서 베이징까지의 44년간은 ‘아시아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도쿄-서울-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세계는 아시아가 낙후지역에서 벗어나 잠재력과 역동성을 가진 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세계로 뻗는 도약대

세 나라 모두 올림픽 직전까지 두 자릿수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이뤄낸 신흥국가였다. 올림픽 개최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2500(중국)∼4500(서울)달러 수준으로 엇비슷했다.

물론 경제규모는 다르다. 지난해 세계 4위였던 중국의 경제력은 올해 3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되며 21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3개 도시는 올림픽을 전후해 도로와 교통망 등 인프라 정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도쿄 올림픽 직전인 1964년 10월 도쿄∼오사카(大阪) 신칸센이 뚫렸다. 지하철과 수도고속도로도 이때 완비됐다.

베이징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터미널이 문을 열었고 시속 300km의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중국이 올림픽에 직접 쏟아 부은 투자액은 경기장 건설비 132억 위안을 포함해 2932억 위안(약 43조9800억 원). 2001년 7월 이후 투자한 간접비용까지 포함하면 1조5000억 위안(약 225조 원)에 이른다.

한국도 서울 올림픽을 위해 2조3800여억 원을 들여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 올림픽 후 일시적 경기침체

숨 가쁜 인프라 확충의 후유증으로 도쿄와 서울은 올림픽 후 잠시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1965년 ‘올림픽 불황’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으나 그해 11월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해 1970년 7월까지 57개월간 경기확장기가 이어졌다. 이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5%에 이르렀고 근로자 급여는 79.2%가 늘었으며 개인소비는 연평균 9.6%씩 증가했다.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인의 꿈은 흑백 TV, 냉장고, 세탁기의 ‘신종(神種) 3기’를 갖는 것이었지만, 올림픽을 거치고 난 뒤에는 이것이 3C로 바뀌었다. 컬러 TV, 쿨러(에어컨), 자동차가 그것.

‘올림픽 불황’은 한국도 겪었다. 경제성장률이 1988년 10.6%에서 이듬해는 6.7%로 떨어진 것. 1990년에는 다시 9%대로 회복됐다.

중국의 경우도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보여 온 연평균 9.8%의 성장률이 올림픽 이후 둔화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다. 중국 정부는 최근 양적성장을 중시하는 ‘여우콰이여우하오(又快又好)’ 전략에서 질적 성장을 중시하는 ‘여우하오여우콰이(又好又快)’로 바꿨다.

○ 당당한 국제사회 일원으로 자리매김

도쿄 올림픽이 일본이 패전의 상처를 딛고 국제사회로 복귀한 것을 알리는 상징이었다면 19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쳐 열린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민주화를 세계에 고했다. 베이징은 세계 중심에 우뚝 서는 ‘국운 상승’의 꿈을 꾸고 있다.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1990년 러시아와 국교 수립, 1991년 유엔 가입, 1992년 중국과 국교 수립 등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다. 서울 올림픽은 또 1980년 모스크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동서 한쪽의 보이콧으로 반쪽 올림픽이 된 데 비해 12년 만에 동서진영이 한자리에 모인 ‘동서 화합의 올림픽’이기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과 함께 일본에는 급격히 서양문화가 유입됐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1960년대 후반의 학원 분쟁 등으로 연결됐다.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앞에는 심화되는 양극화, 티베트 등 소수민족 문제, 언론 자유와 인권 문제 등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 화려한 조명 뒤 그림자

올림픽은 ‘국민통합의 장’ 역할도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3국은 시민 매너를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줄을 서자’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가져가자’는 1964년 도쿄에서 벌어진 캠페인이다. 한국에서도 1988년을 전후해 벌어진 공중도덕 캠페인의 기억이 생생하다. 시민들은 ‘세계’라는 관중 앞에서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화려한 올림픽의 뒤꼍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철거민과 노점상들이 보이지 않았듯이 올림픽 기간 베이징에서는 건설의 주역인 농민공들이 쫓겨났다.

공해는 2008년 베이징뿐 아니라 1964년 도쿄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중국 정부나 베이징 당국이 가장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인 것도 환경 대책이었다.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2001년부터 베이징 정부는 환경 인프라 정비에 약 42조 원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의 버스나 택시에 천연가스 연료가 도입됐고 연기를 뿜는 공장은 베이징 시내에서 상당수 사라졌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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