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으로 자유 지킨 6·25 잊혀진 전쟁 만들순 없어”

  • 입력 2008년 6월 24일 20시 28분


"한국전쟁(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하기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너무도 많은 희생을 치른 전쟁이었고 미국은 물론 세계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중부의 미주리 주 서쪽 끝에 있는 인디펜던스 시. 인구 11만 명의 낯선 이 도시에 미국 내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한국전쟁연구센터'가 있다.

창립자는 18세 때 한국전쟁에 참전해 '철의 삼각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폴 에드워즈(73) 박사.

그레이스랜드대 철학교수인 그는 20년이 넘게 한국전쟁 자료를 모아 보존해 왔다. 한 줄로 세우면 580m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작전계획도, 명령문, 지도, 병사들의 편지, 일기, 사진 등 귀한 자료가 많아 미국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를 24일 인터뷰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을 먼저 물었다.

"1953년 3월 징집돼 포병부대 소속으로 서울의 동북부 전선에 배치됐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니까 18세 때였고 결혼 한 달째였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겠군요.

"솔직히 그랬습니다.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미국 교육의 실패를 보여주는 거지요(웃음). 전쟁이 터졌다는 발표를 그전에 들은 적은 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별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왜 싸워야 하는지 회의도 들었겠네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바다를 건너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군 당국에서 설명한 참전 이유는 '공산주의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였죠. 일방적으로 침공을 당하면 맞서 싸울 권리가 있고, 그 경우엔 '정당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때론 겁이 났고 가족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당시 아내는 너무 어렸습니다."

―한국전쟁 연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대부분의 미국인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전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1980년 초에 책을 쓰려는데 의존할 만한 소스가 거의 없더군요."

그는 먼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주변의 자료, 물품들을 챙긴 뒤 자료수집 활동의 폭을 넓혀 가다가 1987년 연구소를 세웠다. 친구들이 조금씩 도움을 줬다.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센터는 날로 커갔다. 현재 소장직은 고교 교사인 아들이 맡아 실무를 진행하고 있다. 에드워드 박사는 그동안 한국전 관련 책을 9권이나 썼다.

―한국전쟁이 미국 역사에서 왜 그토록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1950년 당시 미국인들은 평온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계대전에 지쳤기 때문이지요.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분쟁의 확산을 원치 않을 것이며, 유엔은 개입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 가정할 이유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선 북한의 침공을 묵과하면 소련의 일본, 필리핀 점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당초 한국을 '우선 방어 대상'에서 배제하고 있었던 트루먼 정부는 외교 군사정책을 급격히 바꿔 소련의 공격성에 맞선 강력한 정책을 폈습니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의 정책이 바뀌었고 세계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경제 군사지원 증가, 미국의 군비증강, 전 세계 곳곳에서 공산주의의 공격성에 대비한 준비 등을 낳았습니다."

일각에선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아무리 작은 마을을 가도 참전용사나 유족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전 3년여 동안 미군 사상자는 전사 3만3686명, 일반사망 3254명, 실종 및 포로 8176명, 부상 9만2134명(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에 달한다. 10년이 넘게 치른 베트남전쟁 미군 사상자(전사 5만8000명, 실종 2000명)와 비교하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제가 살던 캔자스시티 인구가 3만5000명가량이었는데 50명가량이 참전했어요. 나중에 돌아와 보니 아는 사람만도 6명이 숨졌더군요."

―그런데도 왜 '잊혀진 전쟁'이 되었을까요.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젊은이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기억하거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런 건지 만약 누군가 답을 안다면 (나도) 듣고 싶습니다."

―1980년대 들어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북침유도설' 등을 주장하며 미군의 참전 정당성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런 주장은 틀렸다고 봅니다. 만약 미국의 남북전쟁이라면 어느 한 쪽에 온전히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고 단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한국전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한쪽이 침공하면 한 쪽은 그걸 멈추기 위해 싸울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목적(cause)을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해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즈 박사는 "지금까지 재미 한국인 학자는 몇 명 연락을 해왔지만 한국의 학자나 참전용사가 연락을 해온 적은 없었다"며 "센터의 자료는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전 자료를 모아 보존할 시간 여유가 많이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생존 참전용사의 평균 연령은 79세 정도로 추정됩니다. 생존자가 2000년보다 30%나 줄었습니다. 한 달에 평균 1000명씩 타계하고 있습니다. 참전용사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한국전쟁의 진실을 모으고 싶어도 더 모을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 박사에게 한국전쟁 발발 58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1955년 한국에서 돌아온 뒤 한번도 한국에 가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한국의 변화에 대해 계속 읽고 있습니다. 놀라운 나라로 변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마지막 본 한국은 평평했습니다. 빌딩이 없었는데 요즘 사진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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