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세계화’ 중산층 마저 휘청

  • 입력 2008년 5월 6일 03시 00분


《프랑스인 기 탈포와 안로르 르나르 씨 부부는 요즘 시내 베이커리에서 바게트 빵을 사 먹는 대신 공장에서 양산되는 값싼 빵을 산다. 그동안 카르푸에서 사오던 생필품은 집 앞 가게의 싼 제품으로 대체했다. 자동차 두 대 중 한 대는 팔았다. 우체국 직원과 교사인 탈포 씨 부부의 연간 수입은 4만 유로로 프랑스의 중산층에 속한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급속히 뛰어오른 물가가 이들의 평범한 삶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최근 전한 프랑스의 한 중산층 가정 이야기다.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과 아시아 각국의 서민들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생활비 부담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더욱이 급격한 물가상승은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유지해 오던 전 세계 중산층의 생활패턴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美 물가 4% 육박… EU도 목표치 3.2%로 상향

각국 중산층 지갑 꽁꽁 라이프스타일 대변화

▽인플레이션의 악몽=현재 진행 중인 인플레이션은 글로벌 현상이다. 배럴당 120달러 가까이 치솟은 전례 없는 유가와 곡물, 원자재 가격의 오름세는 전 세계 물가를 연쇄적으로 끌어올렸다.

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도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7.57%로 3년 6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인도 정부는 “물가상승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이 문제를 1순위 정책 과제로 내걸었다.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도 다음 달 물가상승 억제에 초점을 맞춘 정부 예산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유로존(유로 통화를 사용하는 15개 국가)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3.3%로 3월(3.6%)보다 소폭 낮아졌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의 목표치 2%를 여전히 상회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유럽집행위원회는 올해 인플레이션 전망을 기존 2.6%에서 3.2%로 상향 조정했다.

유럽연합(EU)의 호아킨 알무니아 경제담당 집행위원도 지난달 28일 “유럽이 매우 강한 인플레이션 쇼크로 고생하고 있다”며 “추가 물가상승은 경제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도 4%에 이른 상태다. 특히 경기 침체를 우려한 미국 정부가 지난해 9월 이후 7차례나 금리를 인하하면서 통화가치가 더 떨어졌다.

▽무너지는 중산층의 꿈=이런 물가상승은 탄탄한 복지 시스템을 갖춘 유럽의 중산층마저 ‘추락’의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럽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독일의 경우 중산층 비율이 2000년 62%에서 올해 54%로 떨어졌다고 독일경제조사연구소가 분석했다.

스페인 BBVA은행의 줄리안 쿠베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벌어들이는 돈보다 물가가 더 빠른 속도로 오를 경우 사람들은 하루하루 더 가난해지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불안감은 각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는 마리아 살가도(37) 씨는 최근 건강식품과 유기농제품 매장에 발길을 끊었다. 정신과 심리상담 횟수도 절반으로 줄였고, 주말에 아이들과 자주 다니던 여행은 부모님의 시골집 방문으로 바꿨다.

이탈리아인 디 피에트로 씨 부부는 외식비를 아끼기 위해 도시락 가방을 꺼내 들었다. 옷은 중고품을 사고 최근 여행에서는 호텔 대신 캠핑장을 이용했다. 이탈리아의 가계 소비는 지난해보다 1.1% 떨어졌고, 특히 레저와 레크리에이션 분야의 소비는 5.5%나 줄었다.

인도 델리의 라케시 아로라 씨 가족은 올해 여름 여행과 자녀들의 크리켓 강습 계획을 취소했다. 기업의 마케팅 담당 중역인 아로라 씨는 지난해까지도 쪼들린다는 느낌 없이 살아왔지만 최근 기름값과 식료품값이 30% 이상 오르면서 지출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뉴스전문 채널 NDTV는 지난달 “인플레이션이 중산층의 주머니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다”며 “식료품 예산을 줄이는 것도 상황 개선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 콘퍼런스보드가 지난달 29일 밝힌 소비자신뢰지수는 62.3으로 5년래 가장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소비자들의 경기회복 기대감이 낮아지면서 앞으로 상당 기간 지갑을 열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미국 내로프 경제연구소의 조엘 내로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AP통신에 “소비자들이 앞으로 슈퍼마켓과 주유소에서 더 큰 물가상승 쇼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찰스 슈머 미국 상원의원은 “수입과 자산가치는 줄어드는 반면 물가는 계속 오르면서 중산층 가정의 지갑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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