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영화

  • 입력 2008년 3월 3일 19시 44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장동건과 원빈이 비극의 형제를 연기했다=MK PICTURES 제공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장동건과 원빈이 비극의 형제를 연기했다=MK PICTURES 제공
“웰컴 투 동막골”의 한국판 포스터=film itsuda 제공
“웰컴 투 동막골”의 한국판 포스터=film itsuda 제공
‘반공’으로부터의 탈출

《한국 영화는 조선 전쟁(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을 지속적으로 그려 왔다. 최근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한류’작품들은 민족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가고 있다. 》

검열 폐지로 다양해진 표현 방법

1990년대 말 한국 영화는 크게 변화했다.

그 변화는 2000년경부터 잇달아 등장한 조선 전쟁과 남북 분단에 관한 대작에서 엿 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하는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격동적인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그리고 큰 스케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과 분단을 ‘표현하는 방법’이 새로워졌다.

강제규(姜帝圭) 감독은 국내외에 새로운 시대 한국 영화의 힘을 알린 “쉬리”(1999년)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를 통해 남북 분단을 정면에서 다루었다. 강 감독은 이번 취재에서 영화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의 한국 영화는 한국 전쟁이나 분단을 다룰 때 반공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그렸다. 나는 거기서 탈출을 하고 싶었다.”

예를 들자면 “쉬리”는 한국의 정보 기관원과 완벽하게 서울 시민으로 탈바꿈한 북한 공작원과의 연애가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북한 측의 인물을 ‘인간’으로서 그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JSA”(2000년)도 남북 병사의 교류가 테마다.

조선 전쟁과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구도는 한결 같았다. 남쪽은 정의롭고 북쪽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었다. 즉 군사 정권 하의 국책이었던 ‘반공’이 관철되어 왔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만들어진 영화법은 그때까지도 존재했던 검열을 한층 강화시켰고, 영화인의 손발을 묶었다. 이 시대에는 반공법도 있어 북한을 호의적으로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쁘게 그리지 않으면 ‘용공’혐의를 받기도 했다. 한편, 반공 영화를 만든 영화사에는 보너스가 주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규제가 한층 더 강화되어 영화계에 있어서는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

한국 영화 진흥 위원장인 안정숙(安貞淑) 씨는 오랜 세월 기자로서 영화계를 취재해 왔다.

“엄한 검열이 영화의 매력을 빼앗아 버렸고, 도식화된 반공 영화를 관객들은 외면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부터 검열이 폐지되어, 억압되어 온 다양한 소재들이 영화로 분출된 것입니다.”

영화의 변화는 민주화와 함께 찾아 왔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 산업 육성에 나섰다. 당시 30대로, 1980년대에 학생으로서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1960년대 태생의 ‘386세대’가 영화계에 대두했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 감독과, “JSA”의 박 감독도 이 세대다.

한국 영화를 잘 아는 도쿄 국제영화제의 연출자 이시자카 켄지(石坂健治) 씨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읽고, 그들 나름대로 재구축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언급하기조차 어려웠던 조선 전쟁 중 한국 정부에 의해서 살해된 주민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최근의 작품들은 북한을 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공유하는 같은 민족으로서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데올로기로 뭉쳐진 ‘국가의 관점’에서, 누구라도 경험하는 연애와 우정 등을 줄거리의 축으로 한, ‘개인이란 관점’으로 변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도 있다. 즉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에 한국에서 히트를 친, “웰컴 투 동막골”은 조선 전쟁 중에 남북한의 병사와 유엔군의 한 일원인 미군 병사가 평화로운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우정을 키워나가는 판타지 작품이다.

박광현(朴光鉉) 감독은 “한국 전쟁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디까지나 무대의 배경으로 한국 전쟁을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반전 영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비극이 아니라 희망으로 끝나는 작품을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 공개 후, 관객뿐만이 아니라 일부 미디어에서도 ‘반미친북’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작년 말,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예술원 회장이 된 김수용(金洙容) 감독은 109 편의 작품을 찍은 대 베테랑 감독이다. 영화계의 ‘어두운 시대’를 살아 왔다. 검열로 필름을 몇 번이나 잘렸다. “반공 영화도 3개 만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탄생과 함께 자신을 괴롭힌 ‘검열 기관’의 후신인 영상물 등급 위원회의 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재임 기간 중 심사한 작품에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JSA”가 있었다. 퇴임 후에는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서 아! 라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형제가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것은 거의 만화지요. 확대 해석하면 얼마든지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세계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현실로서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영화라는 것은 상상의 예술입니다. 그 상상과 표현이 자유로워진 지금, 감독들의 폭 넓은 상상의 세계를 즐겨야 하겠지요.”

니시 마사유키(西正之)

▼거장 임권택 감독의 마음 속 “그 시대를 냉정하게 그렸었는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임권택(林權澤) 감독(71)은 “서편제”등 한국의 전통과 풍경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예전에는 조선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어떠한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임 감독에게 물어 봤다.

좌익과 우익의 항쟁, 그리고 조선 전쟁이라는 혼란기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962년에 감독으로 데뷔해, 초기에 전쟁 영화를 몇 작품 만들면서, 1973년에는 군이 전면적으로 협력한 국책 전쟁 영화 “증언”의 감독으로 지명되었다.

“명예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뒷일을 생각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가족 중에는 좌익 활동을 한 사람도 있어 당시는 연좌제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보자면 나는 환영할 만한 존재가 못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전쟁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는 나 외에 없었다.”

소년 시대에 경험한 사상 대립이나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검열의 시대였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항상 검열관의 눈으로 내 자신을 속박해 왔다. 그런 날 들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졌다.”

민주화가 진전된 1994년, 자신의 조선 전쟁관을 대작 “태백산맥”에 담았다.

“어떠한 이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희생 위에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민족의 희생만을 남겼다.”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에 편중되지 않은 작품이라 어느 세력으로 부터도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조선 전쟁에 관한 영화는 만들지 않고 있다.

“우리 세대는 전쟁과 분단에 의한 후유증을 지금도 안고 있다. 정말로 그 시대를 냉정하게 그려온 것 일까. 나는 이제 전쟁의 그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상처가 없는 세대들의 영화에 기대를 건다.”

◇ 1936년 전라남도 장성 출생. 2002년 “취화선”으로 칸느 국제영화제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작년에 공개된 “천년학”이 통산 100번째 작품이다.

영화법과 검열

한국의 영화 제작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총독부의 통제와 검열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조선 전쟁의 혼란기 등을 거쳐서, 1962년에 사전 신고•상영 허가 제도를 포함한 ‘영화법’이 제정되었다. 이 영화법은 1986년까지 여섯 번 개정되었으며, 1966년 개정에서는 시나리오도 포함한 사전 검열 제도가 도입되었다.

체제 유지를 위해 문화, 예술 활동을 규제하고자 한 박정희 정권 시대인 1973년에는 4차 개정이 있었고 검열은 한층 더 엄격해 졌다. 이후, 영화에 있어서 1970년대는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전두환 정권 하의 1984년 5차 개정에서는 검열 제도를 폐지하고 ‘사전 심의제’를 도입했지만, 사실상 사전 검열이었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사전 심의제를 위헌으로 판단하여, 검열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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