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7장 亞太전쟁과 국공 내전(下)

  • 입력 2008년 2월 21일 17시 27분


“우리 집에 일본병사 20명 정도가 도망쳐 와 숨었다. 정말 무서웠다”라고 말하는 류이옌첸(呂彦琛) 씨. 문 지붕은 1948년 당시의 전투로 부수어진 채라고 한다. =중국 산시서성(山西省)의 남쪼엉촌 (南莊村)에서, 구마모토(隈元)가 촬영.
“우리 집에 일본병사 20명 정도가 도망쳐 와 숨었다. 정말 무서웠다”라고 말하는 류이옌첸(呂彦琛) 씨. 문 지붕은 1948년 당시의 전투로 부수어진 채라고 한다. =중국 산시서성(山西省)의 남쪼엉촌 (南莊村)에서, 구마모토(隈元)가 촬영.
●국공 양군에 잔류 일본인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전쟁에 지고 평화로운 ‘전후’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한 것으로 말미암아, 패전 후에도 현지에 남겨져 ‘전후’의 전쟁을 이국의 병사로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경험을 하였으리라고는”이라고 말하는 한 명의 학생을 만났다.

도쿄도(東京都) 마치다시(町田市)에 있는 오비린(桜美林)대학 2 학년, 아베 다쿠미(阿部 拓真) 씨(22)다. 1945년 3월에 소집되어 중국에서 싸운 할아버지 요시오(善夫) 씨는,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9년이나 지난 1954년에 귀국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해 왔지만, 1963년 3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다쿠미(拓真) 씨가 태어난 것은 22년 후로, 할아버지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랐다.

후쿠시마(福島)에 사는 할머니 데루코(照子) 씨(73)도,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시오(善夫) 씨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 남편이 침묵한 의미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2007년 2월에 어떤 영화를 보았을 때였다고 한다. 전후에 중국 국민당 군으로서 공산당 군과 싸운 일본병사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개미 병사들(蟻の兵隊)” (이케야 가오루(池谷 薫) 감독)이다.

9월 도쿄(東京)에서 열린 상영회에 다쿠미씨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지고 갔다. 강연 차 와 있던 영화의 주인공, 오쿠무라 와이치(奥村 和一) 씨(83)에게 사진을 보여 주자, “젠프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름을 중국식으로 부르던 사이로 소년병 훈련 시절부터 중국 내전까지 같이 했고, 일본에도 함께 돌아왔다. 그런 전우의 손자와 이런 식으로 만나리라고는 오쿠무라(奥村) 씨에게도 감격적인 대면이었다.

오쿠무라 씨와 같은 군인들은 왜, 전후에도 싸워야만 했을까. 아베 요시오 씨는 왜 입을 다문 채 죽어 갔을까. 나는 옛 전쟁터를 방문하기로 했다.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도읍인 타이위안(太原). 여기에 전쟁 중, 일본군 ‘지나(支那) 파견군 북지나 방면군 제 1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소집을 받은 오쿠무라씨는 1944년 말에 타이위안(太原) 북쪽에 위치한 닝우(寧武)에 도착했다. 영하 20도로,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니가타(新潟) 출신인 오쿠무라씨도 견디기 힘든 아주 추운 날씨였다고 한다.

사실이지 지금도 이 곳은 춥다. 1948년 국민당 군으로서 격투를 거듭하다가, 100명을 넘는 일본병사가 사망한 타이위안교외의 뉘우토어짜이(牛駝寨)의 포대(砲臺)의 옛 터를 보고 싶었지만 , 눈이 많이 쌓여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장병 2600명 / ‘상관의 명령으로’잔류

일본은 1945년 8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장병들은 무장 해제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군 5만 9천 명 가운데 2600명이나 잔류하여, 공산당 군과의 전투에서 550명이 사망했고, 오쿠무라씨 등 7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그럼요, 물론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지요”라고 오쿠무라씨는 말한다. “그렇지만, 상관이 남으라고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은 천황의 명령. 항명이나 반항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조직적으로 잔류하였는가. 전사한 친구들의 한(恨)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오쿠무라씨 등은 일본과 중국에서 단서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의 산시성(山西省)은 국민당 계열의 군벌 리더인 옌시산(閻錫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일본의 철퇴 후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 옌시산(閻錫山) 군의 열세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의 제1 군사령관, 스미타 라이시로(澄田四郎) 중장들에게는 전범 용의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측과 옌시산측은 일본군을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는 대신에 옌시산(閻錫山) 을 위해 일본군 일부를 남기겠다는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국한 오쿠무라씨 등은 자신의 의사로 잔류했다고 간주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구 군인으로서의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정부를 대상으로 퇴역군인 연금 청구 관련 재판에서도 패소했다.

948년 7월에 오쿠무라씨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남쪼엉촌(南莊村: 타이위안에서 남쪽)을 방문하였다. 벽돌담 여기저기에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서 국민당 군은 공산당 군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14세였던 농민, 류이옌첸(呂 彦琛) 씨의 집에는 20명 정도의 일본병사가 점거해 2일 동안 있었다고 한다. 류이(呂) 씨는 뒷마당 지하에 숨어서 전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

“일본 병사도 많이 죽었고, 시체를 방에 겹겹이 쌓아 놓았다. 싸움이 끝난 후에 청소를 했지만, 시체의 기름이 마루바닥에 배어 지독했어요.”

오쿠무라씨 등을 포위한 공산당 군의 기관총 반장이었던 후핀(胡蘋)씨(75)와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은퇴해서 타이위안에 살고 있다.

“일본병사에게서 무사도 정신을 느꼈어요. 옌시산 군대와는 달리 좀처럼 항복하지를 않았어요. 몇 번이고 무기를 버리는 채 하면서 공격해 왔어요. 그렇다 해도 왜 일본인이 옌시산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 너무나도 이상했어요.”

타이위안은 1949년 4월 공산당 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잔류 일본병사들의 전쟁도 끝났다. 그 전에 포로가 된 오쿠무라씨는 1948년 12월에 베이징(北京)으로 옮겨져 곧 톈진(天津)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1월 공산당 군은 톈진을 함락시켰고 이어 베이징에 무혈 입성했다. 그 군대 안에도 실은 일본인의 모습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 공산당 군에서 부상병 운반 대원으로

나는 타이위안에서 톈진으로 향했다.

도쿄에 사는 효도 요시키요(兵頭 義清) 씨(79)가 가르쳐 준대로, 톈진 함락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열사 기념비’에는 전우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일본은 1932년, 중국 동북부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많은 개척민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만몽개척(満蒙開拓) 청소년 의용대로 불린 소년들이 있었다. 효도(兵頭) 씨는 1943년에 이 간부 양성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에히메(愛媛)에서 하얼빈으로 왔다. 1년 늦게 오사카(大阪)에서 온 이가 사카구치 고조(坂口 光造) 씨였다.

●두 사람은 그 이후의 운명을 함께 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9월, 부상병을 운반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관동군(구 만주(満州)의 일본군)의 부상병들을 귀국 열차에 싣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착한 곳은 국공 내전의 격전지로, 공산당 군의 운반병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짐작이라도 가지만, 관계자에게 폐가 될까 싶어서”라며, 효도씨의 입은 무거웠다.

총탄이 난무하는 전투의 최전선지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운반 부대는 결사적이었다. 체력이 약한 효도 씨는 부상을 치료하는 위생병이 되었지만, 체격이 좋은 사카구치(坂口) 씨는 들 것을 계속 메었다.

그러던 1949년 1월 15일. 효도씨가 소속한 부대가 국민당 군의 사령관을 체포하여 톈진이 해방의 기쁨에 싸인 와중에, 사카구치씨의 비보가 도착했다. 박격포를 맞아 내장이 튀어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효도씨는 중국 각 지의 전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내전이 끝난 후에는 약제사가 되어 1958년에 귀국했다. 오사카에서 사카구치씨의 유족을 필사적으로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의 톈진에 그의 이름은 남아 있는 것일까. 확실히 ‘기념비’는 서 있었지만, 도시 개발로 부지는 잘려나가고, 전사자의 명부도 다른 묘지공원에 옮겨져 있었다. 그 곳을 방문하였더니, 직원이 안 쪽에서 명부를 꺼내 주었다. 2025 명의 이름을 순서대로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에 ‘사카구치 고우키(坂口光熙)’라고 쓰여 있었다. 사카구치씨의 이름을 잘못 쓴 것임에 틀림없다.

톈진 시내에는 당시의 전투 기록을 전시하는 ‘톈진 전역(戰役;전쟁) 기념관’도 있었다. 기념관의 전사자의 이름을 1명씩 새겨 놓은 코너에도 사카구치씨의 이름은 없었다. “일본인이 있었다고는 전혀 몰랐다. 중일 우호에 힘을 기울이고 싶기 때문에, 만약 유품이 있으면 꼭 전시하고 싶다”라고 리우꽝신(劉光欣) 부관장(48)은 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의사, 기술자・・・・・・ / 억류된 채 노동당한 수만인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쌍방에 일본인이 있었고,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현지에서도 잊혀지고 있는 가운데, 실증적인 연구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사이타마현(埼玉県)에 있는 다이토 문화대(大東文化大)의 루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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