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반품 손님에 더 친절’ 일본의 商道

  • 입력 2007년 10월 1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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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고려 충정왕이 즉위한 해에 문을 연 만주(饅頭)회사 ‘시오세총본가’가 아직 성업 중이다. 전화와 서면으로 간곡히 인터뷰 요청을 한 끝에 5일 이 회사의 가와시마 에이코(川島英子·83) 회장과의 인터뷰가 어렵사리 성사됐다.

인터뷰를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에 쫓기고 있을 때, 마침 시내에 나간 동료 K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은 도시락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K가 사온 것은 택시 기본요금의 반값인 350엔짜리 ‘초(超)염가’ 도시락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던가. 식사가 끝날 무렵 반찬에서 금속 수세미 조각이 튀어나왔다. 화가 치밀었지만 인터뷰에 신경이 쏠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도중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가와시마 회장은 시오세총본가가 658년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비결 중의 하나로 가훈(家訓)을 꼽았다. 13개항의 가훈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물건을 사러 온 손님보다 반품하러 온 손님에게 친절하라.’

가와시마 회장에게 아직도 이 가훈을 지키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장사의 기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시오세총본가는 제품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을 접수하면 영업담당자가 ‘반드시 그날’ 찾아가 사과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니 책상 위에 종이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과실주 한 병, ‘긴자스에히로 총무·경리담당 차장 T’라고 쓰인 명함 한 장, 편지봉투 한 장이 내용물이었다. 봉투 안에는 100엔짜리 동전 3개와 50엔짜리 1개가 들어 있었다.

K에게 경위를 물었다. 도시락회사에 항의 전화를 했더니 명함의 주인공인 T 차장이 부리나케 달려왔다는 게 K의 설명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깍듯한 사과에 ‘가벼운’ 감동이 스쳤다.

그런데 재일교포인 K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T 차장의 대응은 아주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번은 은행의 창구직원이 “실수로 서류 하나를 건네는 것을 깜박했다”며 상사와 함께 찾아와 깍듯이 사과하더라는 체험담까지 덧붙였다. 내용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대단치 않은 서류였다고 한다.

K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너무 쉽게 용서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지인 A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A는 2년 전 일본 근무 발령을 받았을 때 한국의 유명 백화점에서 노트북PC를 샀다. ‘애프터서비스’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본에도 PC메이커의 지사가 있어 수리가 된다는 판매원의 설명을 듣고 구입을 결정했다. 이 약속이 공수표임이 확인된 것은 1년도 안 돼 PC가 고장 났을 때였다.

백화점 측은 일본에 부품이 없다며 PC를 한국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때마침 한국에 가는 인편이 있어 PC를 보내기는 했지만 “운송비는 고객이 부담하라”는 백화점 측의 반응에 A는 기가 막혔다. 더구나 백화점 측은 수리가 끝나자 “무상수리 보증기간이 끝났다”며 수리비까지 청구했다.

실랑이 끝에 수리비를 무는 일은 면했지만, 고쳐 온 PC가 며칠 만에 다시 고장 나는 바람에 A는 똑같은 소동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야 했다.

A는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백화점 바닥에 PC를 내팽개치면서 이렇게 외치는 상상을 하며 분을 삭인다. “수리 필요 없어. 다시는 여기서 안 사.”

최근 자동차를 비롯한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기본이라고 한다.

‘애프터서비스’는 일본기업들이 만들어 낸 엉터리 일본식 영어다. 한국에서는 이를 일본기업들의 ‘짧은’ 영어 실력을 비웃는 소재로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내용물까지 깔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세계 전자산업의 역사를 바꾼 ‘워크맨’도 엉터리 일본식 영어였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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