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 맞은 靑 “이젠 어떤 카드를…”

  • 입력 2007년 7월 31일 03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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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한국인 인질 한 명을 추가로 살해함에 따라 한국 정부의 고민도 깊어졌다.

이미 쓸 만한 협상 카드를 다 쓴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어서 정부가 인질 추가 살해 소식을 접한 뒤 어떤 방향으로 협상을 새로 이끌어갈지 주목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이 소식에 대해 “인질 살해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청와대 관계자는 탈레반 무장 세력이 30일 오후 4시 반과 8시 반(한국 시간) 두 차례 협상 시한을 연장한 끝에 또다시 이틀을 늘렸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만 해도 “협상에 무게를 둔다는 의미이지 않겠느냐”며 “중요한 이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도 “대화를 통한 평화적 사태 해결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같은 조심스런 희망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뒤집어졌다.

특사까지 파견했지만 협상이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불안한 조짐은 이미 일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29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만났지만 30일 자정까지도 피랍 사태는 해결의 가닥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탈레반 측은 한때 “협상 완전 실패”를 선언하는 등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반영한 듯 노 대통령은 30일 오후 제14차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피랍자들의 안전과 조속한 석방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강화하고, 아프간에 있는 백 특사는 2, 3일 더 머물며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고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 오라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 5일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둔 카르자이 대통령과의 2차 면담 추진 가능성도 있다.

▽이제는 ‘카드’가 없다?=특사가 인질 구출을 위한 군사작전을 옵션에서 제외한 상태에서 정상외교에 준하는 최고위급 교섭을 펼쳤지만 30일 밤늦게까지 협상에 진전을 끌어내지 못하자 정부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는 “인질을 풀어 주는 것이 이슬람 율법에 맞는다”는 식의 도덕적 접근 외에 협상 카드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동문제 전문가는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남아 있지만 정부의 초반 대응이 탈레반 무장 세력의 기대감을 부풀린 측면이 있다”며 “정부가 속전속결을 노렸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지렛대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인질이 추가로 살해됨에 따라 백 특사의 카르자이 대통령 면담도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오히려 아프간 정부가 이번 사태 해결의 최대 걸림돌인 탈레반 죄수 석방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 듯 사태 발생 초기 탈레반이 제시한 ‘협상 데드라인’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하던 정부 당국자들도 “새로운 데드라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30일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자세로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다”고 했다.

▽스스로 협상 입지 좁힌 정부=고비 때마다 정부가 보여 준 대응이 오히려 협상의 입지를 축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피랍 사태 발생 직후 탈레반 무장 세력 측은 21일 오후 4시 반이라는 시한을 정해 한국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다급해진 정부는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인질을 살해하지 않는다면 철군은 물론 무장 세력과의 직접 협상에도 나설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철군 요구는 탈레반의 진정한 요구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며 정부는 그들의 게임에 말려든 셈이 됐다.

탈레반 측은 22일 “무력 동원 시 인질을 죽이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일부 언론이 군사작전이 시작됐다고 보도한 직후였다.

인질의 희생을 우려한 정부는 즉각 “한국 정부의 동의 없는 군사작전은 없다”고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탈레반이 가장 두려워하는 군사작전에 대한 안전판을 제공하는 역효과를 냈다.

탈레반은 25일 배형규 목사 피살 이후 정부가 백 실장을 특사로 파견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정부를 통해 아프간 정부를 압박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수감자 석방을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이날 다시 극단적인 경고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 요구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탈레반 요구정부 대응문제점
“21일 오후 4시 반까지 한국군 철군하지 않으면 인질 살해”(20일)노무현 대통령 “피랍자 조속한 귀환 촉구” 긴급 메시지 발표(21일)사건 초기 정부가 다급한 모습을 보여 탈레반의 요구 수준이 높아졌을 가능성
“인질 구출작전 하면 인질 살해”(22일)“한국 정부의 동의 없는 군사작전은 있을 수 없다”(22일)탈레반이 가장 두려워하는 군사작전 개시에 대해 안전판을 제공하는 역효과
“한국 정부가 직접 우리와 대면해야”(23일)배형규 목사 살해(25일)대통령 특사 아프간 파견(26일)탈레반이 한국 정부를 통해 아프간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빌미 제공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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