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위 사자후’로 소련 무너뜨린 풍운아

  • 입력 2007년 4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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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보수파는 가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991년 8월 21일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보수파의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장교들은 그에 대한 복종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옐친 시대’를 알리는 전환점이 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1991년 “보수파는 가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1991년 8월 21일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보수파의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장교들은 그에 대한 복종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옐친 시대’를 알리는 전환점이 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나이는 밝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며 혼신을 활활 불살라야 합니다.”

맨주먹으로 강경 쿠데타군과 맞서 싸우고, 의회를 공격한 무장 세력을 탱크로 진압하던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옛 소련의 붕괴, 러시아의 탄생, 세계질서의 재편 등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한복판에 그는 서 있었다. 러시아 민주화에 한 획을 그었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삶은 그의 말처럼 불꽃같았다.

▽운명의 전환점=그의 운명을 바꾼 분수령은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였다.

8월 19일 군부와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주축이 된 보수파는 흑해 연안에서 휴가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연금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옐친 전 대통령은 러시아최고회의 청사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쿠데타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청사 주변에 인간 사슬을 만들어 ‘옐친 지키기’에 나섰다. 21일 아침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청사 밖으로 나온 옐친 전 대통령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탔다. CNN 등 전 세계 언론 앞에서 그는 쿠데타의 무효를 선언했다. 장교들은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옐친 전 대통령에게 복종을 선언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소련 보수파의 기도가 3일 천하로 돌아가고 옐친 전 대통령이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시대도 이때 막을 내렸다.

▽옐친의 최근 행적=그는 최근 모스크바 서쪽 근교에서 부인인 나이나 여사와 함께 지내왔다. 자리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물려준 뒤 러시아의 부호와 고관대작들이 사는 모스크바 서쪽을 주거지로 택한 이유는 그의 심장병 치료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옐친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다하며 대권을 물려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 옐친 전 대통령은 올해 2월 흑해 연안 동계올림픽 후보지인 소치를 방문했을 때 수십 명의 크렘린 경호원을 수행하고 차량도 제공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지난해 2월 1일 옐친 전 대통령의 75세 생일에는 크렘린에서 성대한 축하 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옐친에 대한 평가 엇갈려=옐친 전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를 촉진하고 러시아에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러시아의 ‘첫 포스트 공산주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저항하는 것으로 서방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대국 러시아를 외교적 발언권이 약한 소국으로 전락시켰다는 비난도 듣는다. 대통령 재직 때 외환위기를 몰고 와 국가를 부채의 늪에 빠뜨렸다. 또한 무리한 체첸 전쟁으로 수차례의 ‘보복 테러’를 불러오기도 했다.

러시아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기도 했지만 소련이 해체된 것도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였다. 대통령 재직 때 외교 현장에서 음주와 잦은 말실수, ‘병상 정치’로 구설에 올라 지도자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 푸틴 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화보]‘탱크위 사자후’로 소련 무너뜨린 풍운아 옐친

[화보]‘탱크위 사자후’로 소련 무너뜨린 풍운아 옐친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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