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살아난 2인 64년만에 만났다

  • 입력 2006년 10월 23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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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부산 동구 초량동 아리랑호텔에서 만난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의 생존자인 김경봉 옹(오른쪽)과 설도술 옹이 사고 후 처음으로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부산=최재호  기자
19일 오전 부산 동구 초량동 아리랑호텔에서 만난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의 생존자인 김경봉 옹(오른쪽)과 설도술 옹이 사고 후 처음으로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부산=최재호 기자
19일 오후 부산 동구 초량동 아리랑호텔. 팔순의 한국 노인 2명이 지친 기색도 없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벌써 6시간째다. 칠순의 일본 노인 2명은 이들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조세이(長生) 탄광 사고에 대한 역사적 실체가 드러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이었다.

“수몰사고 3, 4일 전부터 일본인 근로감독관들이 물이 새는 곳에 상주했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디다.”(설도술 옹)

일본 노인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시 조세이 탄광에서 일했던 일본인들은 사고가 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바닷물이 새는 것을 알아채고 ‘곧 큰일이 나겠구나’ 하고 짐작했답니다.”

한국 노인들은 당시 일본인들이 3개월 전에 사고 가능성을 알았다는 사실에, 일본 노인들은 이를 알고도 조선인들에게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 노인 2명은 64년 전 이국땅에서 한날한시에 같은 참사를 겪고도 평생 서로를 모른 채 살아왔던 김경봉(84·서울 강서구 방화동) 옹과 설도술(89·경북 포항시) 옹이었다.

이들은 1942년 한국인 130여 명 이상이 수몰돼 희생된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우베(宇部) 시 조세이 탄광 한국인 강제징용자 중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에서 확인한 생존자들.

▶본보 4월 22일자 3면
日帝때 수몰 조세이 탄광 韓人생존자 첫 확인

▶본보 8월 7일자 11면
“日, 갱도에 물 철철 넘쳐도 채탄 계속 시켜”

일본 노인 2명은 일본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물 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야마구치 다케노부(75·전 우베여고 교장) 회장과 야마구치대 시마 히로미(73) 명예교수다. 이 모임은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추모비 건립을 위해 1991년 결성된 일본 시민단체다.

일본 학자들과 두 생존자의 면담은 서로 인생의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쉼 없이 진행됐다. 일본 학자들이 조사해 온 내용과 두 생존자의 기억이 합쳐지면서 사건의 실체가 더 구체화됐다.

김 옹은 수몰사고 당시 탄광 측이 인근 마을의 침수 위험 때문에 갱도 입구를 막은 것으로 기억했으나 설 옹은 단순히 징용자들의 가족이 갱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막았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일본 학자들은 바다 밑 10여 km까지 갱도가 뚫려 있었지만 갱도 입구는 뭍에 있어 마을의 침수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설명했다. 탄광 측이 마을의 침수 위험을 핑계로 징용자들을 구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날 만남은 본보 보도를 연달아 접한 ‘조세이 탄광 유족회’가 야마구치 회장에게 생존자가 있음을 알려 극적으로 성사됐다.

야마구치 회장은 올해 3월 심장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하다. 하지만 두 생존자가 고령인 만큼 더 늦기 전에 증언을 기록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19일 정오 아리랑호텔에서 만난 두 팔순 노인은 한참을 부둥켜안았다. 함께 고생한 동료를 만난 기쁨도 잠시. 두 노인은 사고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 자신들의 증언을 일본 시민단체에 들려주기 위해 급히 여장을 풀었다.

진상규명위는 김 옹과 설 옹 말고는 국내에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생존자가 없다고 보고 있다.

면담이 끝난 뒤 야마구치 회장은 “귀한 생명을 그만큼 잃고도 일본 지방 정부가 나 몰라라 하고 있어 우리 시민들이라도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왔다”며 “일본의 생존자와 목격자들에게서 들었던 것보다 진실을 좀 더 명백하게 알게 됐다”고 밝게 웃었다.

부산=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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