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기홍]美 6·25기념비 속 ‘전사 미군 5만4246명’

  • 입력 2006년 7월 29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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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태양은 뜨겁게 작열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군복 단추를 목까지 채운 채 땡볕 아래 앉아 있는 한미 양국 노병(老兵)들의 몸가짐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27일 오전 미국 워싱턴 시내 한국전쟁기념공원. 6·25전쟁 정전 53주년 기념식 개회를 앞두고 잔뜩 몰려온 기자들과 행사 관계자들은 “딕 체니 부통령이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보낼까”라는 추측을 교환하며 그늘을 찾아 오갔다.

그랬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체니 부통령이었다. 기념식 참석을 자청했다는 그가 던질 대북 메시지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의 연설에 미사일 핵무기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참전 용사들에게 들었다는 당시의 역경과 고투, 희생의 스토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성사진에 나타난 한반도 야경(夜景) 얘기를 꺼냈다. 온통 암흑뿐인 북쪽과 휘황한 빛에 휩싸인 남쪽 야경을 대비하면서 그는 “당시 우리가 지키려 했던 대의가 고귀하고 정의로운 것이었으며,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날 한국의 번영과 민주주의가 입증해 준다”고 강조했다.

체니 부통령의 의도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우리의 희생이 한국이라는 번영된 민주주의 국가의 초석이 된 것을 보라. 이라크전쟁도 헛되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에서부터, 한미동맹이 양국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 위에 이뤄진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동맹을 흔들려는 한국 내 일부 흐름과 북한을 싸잡아 질타하려 한 것이라는 풀이까지….

그러나 그 어떤 해석이 맞든 그것이 결코 이날 기념식의 본질이 아님을, 또 체니 부통령이 결코 이날의 주인공이 아님을 일깨워 주려는 듯, 몇몇 참전용사는 공식행사가 끝나자마자 무명용사 군상(群像)으로 다가갔다. 그 아래 새겨진 글귀…. 여러 번 봐 온 것이건만 이번에도 역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전사 미군 5만4246명, 유엔군 62만8833명 (중략)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 달라는 부름에 응한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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