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블레어 “난 이래서 마르크스와 결별”

  • 입력 2006년 6월 1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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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대 새내기 정치인 시절 노동당 당수에게 보낸 무려 22쪽짜리 서한이 15일 공개됐다. 역사학자 로버트 테일러 씨가 노동당 역사 자료 수집 중 블레어 총리의 서한을 발굴해 15일 주간 ‘뉴 스테이츠맨’에 그 내용을 공개한 것.

이 서한은 당내 좌파와 우파를 싸잡아 비판하는 내용으로, 그가 주창해 온 ‘제3의 길’ 노선의 시작점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블레어 총리는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참패를 당한 29세의 신출내기. 이 때문에 당수에 대한 아첨으로 들릴 만한 대목도 수두룩하다.

그가 당시 마이클 푸트 노동당 당수에게 보낸 서한(1982년 7월 28일자)은 푸트 당수의 저서 ‘영광의 부채(Debts of Honour)’에 대한 탄복으로 시작한다. ‘영광의 부채’는 여러 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전기적 에세이 모음.

“당신의 책을 읽고 떠오른 첫 생각은 바로 우리 세대가 구축한 ‘무지의 감옥’이었다. 그 책은 우리 정치사상의 근원이 얼마나 좁은지 보여 줬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탐구 과정을 설명한 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면서도 그 한계점을 명확히 밝혔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점은 그것을 정치적 종복(servant)으로 삼으면 좋지만 그것을 주인(master)으로 섬기면 터무니없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존재의 모든 측면을 끌어안으려 하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삶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제공하는 매력이 있지만, 그것은 곧 진실 찾기를 그만두는 변명이 되고 만다.”

그는 이어 당내 낡은 우파와 극좌파를 한꺼번에 비판한다. 당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과 경쟁하던 노동당은 극좌 트로츠키 주의 투쟁세력이 득세하고, 다른 한편으론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자유당과 연합해 떨어져 나가면서 깊은 내홍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낡은 우파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파산했고 기득권과 너무 밀접하게 얽혀 그들 입에선 곰팡내가 난다”고 비판했고, 극좌파에 대해선 “실체와 구호 사이에 어처구니없는 차이가 난다.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당시 노동당이 내건 일자리 창출과 핵무기 제거 정책을 “현실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적극 찬동하면서, 푸트 당수에게 당내당(黨內黨)인 극좌파의 축출과 낡은 우파에 대한 공격 강화를 제안했다.

필자 테일러 씨는 “당수에 대한 아첨도 주저하지 않는 그의 서한에선 당수에게 인상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인다”며 “동시에 블레어는 영국의 좌파에 확실한 비전을 분명히 제시했다”고 평했다.

어쨌든 치기어린 이 젊은이는 당수의 신임을 샀고 다음 해 노동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구에 출마해 첫 하원의원 배지를 달게 됐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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