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쉰들러’ 62년만에 햇볕…유대인 1000명 구한 독일군

  • 입력 2005년 3월 30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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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플라게 소령의 생전 사진을 들어 보이는 마이클 굿 씨. 사진 제공 뉴욕타임스
카를 플라게 소령의 생전 사진을 들어 보이는 마이클 굿 씨. 사진 제공 뉴욕타임스
“그는 전구도 갈아 끼울 줄 모르는 나의 유대인 할아버지를 군용 차량을 수리하는 노동수용소에서 꼭 필요한 인력이라고 감싸안았다. 나의 어머니에게는 독일군의 양말을 수선하는 일을 맡겨 남아 있게 했다.”

유대계 미국인인 마이클 굿(47) 씨가 전해들은 카를 플라게 독일군 소령의 일화 한토막이다. 그가 1999년 부모와 함께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수용소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시절 플라게 소령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의사인 굿 씨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노인들의 증언을 듣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독일의 옛 문서를 뒤졌다. 추적하면 할수록 그는 플라게 소령이 ‘제2의 오스카 쉰들러’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용소 책임자였던 플라게 소령은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병든 유대인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플라게 소령은 음식을 몰래 훔친 유대인 2명이 나치 친위대(SS)로 이첩돼 목숨을 잃는 것을 막았다.” 수용소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플라게 소령은 나치가 1943년 9월 빌뉴스의 유대인 거주지를 파괴하기 1주일 전 1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인근 수용소로 옮겨 목숨을 구했다. 1944년 7월 소련군이 진격해 오자 수용소 유대인들의 탈주를 돕기도 했다. 철수하는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굿 씨의 어머니도 이때 살아남았다.

플라게 소령은 전쟁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 회부됐지만, 그의 숨은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굿 씨는 뒤늦게나마 보답하고 싶었지만 플라게 소령은 59세 때인 1957년 이미 숨졌다. 자식도 없었다. 굿 씨는 ‘플라게 소령 탐구’라는 책을 내는 한편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정의로운 사람들’ 코너에 그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세 차례의 청원을 심사한 끝에 기념관은 플라게 소령을 받아들였다. 기념관에 이름이 새겨진 독일인은 지금까지 410명. 독일군 출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기념관은 4월 11일 쉰들러 기념수(樹)에서 멀지 않은 벽에 그의 이름을 새길 예정이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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