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유코스 자회사 경매]“유령회사 내세워 유코스 해체”

  • 입력 2004년 12월 20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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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과 전화조차 없는 ‘유령회사’가 수백억 달러짜리 기업을 1시간 30분 만에 먹어치웠다.” 19일 러시아 최대 민간 석유회사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의 경매 결과를 지켜본 전 세계는 경악했다. 정체가 불분명한 바이칼파이낸스그룹이 전 세계 가스 생산의 20%를 차지하는 러시아 국영가스공사(가스프롬)를 제치고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깜짝쇼’의 배경에는 러시아 에너지산업을 장악하려는 크렘린의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외국 자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러시아 시장경제를 발전시킬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쇼’=바이칼파이낸스그룹은 경매가 시작되자 93억7000만 달러를 제시했다. 유코스의 주장에 따르면 300억 달러(약 31조8000억 원)의 기업 가치가 있는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3분의 1 가격에 사겠다고 나선 것.

더구나 함께 경매에 참여했던 가스프롬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입찰액을 써내지 않았다. 경매가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해 진행됐다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다.

가스프롬의 유간스크네프테가스 인수를 당연하게 여기며 연방자산기금(RFFI)에서 경매를 지켜보던 16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은 뜻밖의 결과가 발표되자 기사를 고치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결국 국가의 손에 들어갈 것”=러시아 중부 트베르에 회사등록이 돼 있는 바이칼파이낸스그룹은 사무실과 전화도 없는 ‘유령회사’로 알려졌다. 이번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급조된 페이퍼 컴퍼니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 회사는 경매 결과가 나온 후에도 기자회견 등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하고 있어 의혹은 커져만 가고 있다.

모스크바의 컨설팅회사인 메가트라스토일의 분석가인 알렉산드르 라주바예프 씨는 “이 회사의 실제 주인은 바로 가스프롬”이라고 주장했다. 가스프롬이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직접 인수하는 데 대한 국내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유령회사의 간접 인수를 시도하면서 가격까지 깎았다는 분석이다.

외국계 은행들은 가스프롬이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인수할 경우 금융 지원을 중단하고 신용등급을 내리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결국 눈속임 경매로 시간을 번 뒤 여론이 가라앉으면 실체를 드러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유간스크네프테가스가 아예 러시아 정부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러시아 법무부는 14일 이내에 바이칼파이낸스그룹이 인수 대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경매가 유찰돼 유간스크네프테가스의 자산이 국고로 귀속된다고 밝히고 있다.

▽유코스 결국 해체의 길로=러시아 최대 민간기업이던 유코스는 결국 ‘크렘린의 눈 밖에 난 죄’로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때 러시아 최대 갑부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은 1년 2개월째 감옥에 있다.

유코스 지주회사인 메나테프의 팀 오즈번 이사는 “(유코스의) 파산절차는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코스 측은 이번 경매가 불법이라며 해외 법원에 제소하는 등 마지막 저항을 계속할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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