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오기소 이치로]한국영화는 감정표출 자극제

  • 입력 2004년 11월 12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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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년 9개월. 출장차 일본에 들를 때마다 친구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본다. 한류 열풍 덕분이다. “비빔밥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한국 드라마를 마음껏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등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지인은 “용사마(배용준)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다니…”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요타자동차 일본 본사의 오쿠다 히로시 회장도 열렬한 한국 영화 팬으로 한국 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댈 수 있을 정도다.

한류 열풍 덕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양국간에 존재했던 거리감이 상당히 좁혀졌다고 느낀다면 그건 나만의 생각일까.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도 전보다 많이 따뜻해졌음을 느낀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한류는 나의 단골 대화 메뉴가 됐다. 일본에 가면 최신 한국 문화를 소개해 주고, 한국에 돌아오면 그런 한국 문화에 심취한 일본의 모습을 전해 주기에 바쁘다. 한국의 고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한류에 대해 얘기해 주면 어색했던 사이도 금방 풀린다.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한국의 문화상품이 일본인을 끄는 요인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소나타’(겨울연가의 일본 제목)를 비롯해 DVD로 출시된 한국 영화와 드라마 수십 편을 보았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감정이 풍부하다. 웃고 울고 기뻐하고 낙담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는 감정 표현이 풍부한 한국인의 특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원래 속마음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한 일본인들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10년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무표정하고 피곤한 일상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감정 표출의 자극제가 된 셈이다. 경제성장에 몰두해 개인적인 ‘감정 가꾸기’에 소홀해진 아시아권 사람들에게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하다.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연기자들이 많은 것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강점이다. 내가 처음 본 한국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였다. 문소리씨의 연기가 감동스러웠다. 장애인 연기 촬영 후 등뼈가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한국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인기 배우들은 오랫동안 연기의 기초를 확실히 다진 후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다고 들었다. 주로 예쁜 얼굴을 내세워 드라마에 나오는 일본 배우와 실력차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나보다 더 열렬한 한국 영화 팬인 아내는 벌써부터 귀국할 때 한국 DVD플레이어를 사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지역 코드가 달라서 일본 DVD플레이어로 한국 DVD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압은 220V이지만 일본은 100V라서 아마 변압기도 챙겨 가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귀국할 때 생각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서울에서 더 많은 한국 영화를 마음껏 즐기고 싶다.

▼약력▼

1954년생으로 일본 게이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77년 도요타 입사 후 미국 아프리카 등에서 근무했다.

오기소 이치로 한국토요타자동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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