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트 사망]테러… 독립투쟁… ‘中東 풍운아’

  • 입력 2004년 11월 11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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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세상을 떠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75)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도 흔치 않다.

1970, 80년대 그는 국제 테러리스트의 상징이었다. 그런데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그를 시류에 영합하는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반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민중의 해방자’로 칭송했다.

50여차례의 암살 위협에서도 살아남은 부도옹(不倒翁) 아라파트. 평생의 염원인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지 못하고 ‘자기 땅 없이 살다가 남의 땅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은 곧 팔레스타인의 역사였다.

○비밀스러운 출생

출생증명서에 따르면 그는 1929년 8월 4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스스로는 일관되게 이집트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지도자로서의 정통성과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였다는 분석이다.

경제력이 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와 문학을 좋아하고 토론을 즐겼으며 어려서부터 뛰어난 말솜씨를 자랑했다.

○투쟁에 몸 바친 청년기

1953년 아라파트는 카이로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이집트 군 장교로 임관됐다. 이어 58년 평생의 정치적 기반이 된 ‘알 파타’를 창설했다. 초창기 알 파타는 대(對)이스라엘 투쟁을 위해 잡지 발간 등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다.

알 파타가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표면으로 부상한 것은 1968년 3월의 ‘6일전쟁’ 때. 요르단 국경 인근에서 이스라엘군이 전차부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격했을 때 특공대 450명이 조직적인 게릴라 전술로 이스라엘군을 괴롭혀 이름을 떨쳤다.

이후 알 파타 조직원은 1만5000명으로 급증해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됐다.

○국제사회 전면에 부상

40세 때인 1969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으로 선출된 뒤 그는 세계의 이목을 끄는 방법은 극단적인 테러뿐이라고 판단했다. PLO조직을 무장투쟁조직으로 전환시키고 세계적인 ‘테러범’으로 악명을 날렸다.

그는 항공기 납치, 뮌헨 올림픽 대학살, 자살특공대 차량폭탄테러 등을 일으켰다. 특히 그가 이끄는 ‘알 아크사 순교자 여단’이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와 코치 11명을 살해한 ‘검은 9월단’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고 이후 국제사회는 아라파트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됐다.

1974년 10월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 합법대표로 인정하자 아라파트의 지위는 한층 격상된다. 그해 11월 역사적인 유엔총회 연설에서 그는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나무 가지를 함께 갖고 다닌다. 나의 손에서 올리브나무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정치적 도박

1987년 12월 9일 가자지구에서 4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이스라엘 트럭에 치여 숨진 사건을 계기로 최초의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앞세워 진압할 때 돌멩이나 화염병만으로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모습이 연일 전해졌고 국제 여론은 자연스레 팔레스타인쪽으로 기울었다.

아라파트는 이 흐름을 타고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대도박’에 나섰다. 1988년 12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포기와 이스라엘의 생존권 인정을 전격 발표했다. 13년간 단절됐던 미국과의 대화 창구도 열렸다. 총 대신 올리브나무 가지, 즉 평화를 든 것.

93년 팔레스타인 자치를 허용하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은 공로로 이듬해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이듬해 라빈 총리가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되면서 평화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쓸쓸한 노년

아라파트는 80년대 초반 마약밀매에 개입해 50억달러(약 5조50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집권에 따른 부패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부진으로 팔레스타인 주민은 그보다는 과격 무장조직 하마스를 더 좋아하게 됐다.

200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2차 인티파다를 이유로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파트를 라말라 자치정부 청사 안에 연금해 버렸다. 이때부터 지난달 29일 신병치료를 위해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그는 청사 안에서 생활했다.

병색이 완연한 가운데 팔레스타인 땅을 떠난 그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타국의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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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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