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사드르는 왜 독자노선을 추구했나?

  • 입력 2004년 4월 7일 15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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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제2의 전쟁' 양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국에 맞서는 시아파 저항세력의 핵심인 무크타다 알사드르(31)가 독자노선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피로 정통성 확보=알사드르 집안은 시아파 최고명문가에 속하는데다 피로 물든 가족사까지 배경으로 작용해 '나이 어린' 무크타다가 정통성을 주장하게 됐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는 7일 분석했다.

부친 모하메드 사디크와 숙부 모하메드 바크르는 모두 시아파 최고성직자인 그랜드 아야톨라에 올랐지만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때 살해되거나 고문으로 숨졌다. 무크타다의 형 2명도 1999년 부친과 함께 피살됐고 숙모 빈트 호다 역시 후세인 시절 고문으로 사망했다.

사디크 사망 뒤 카젬 알하에리가 후계자로 지명됐으나 아직 이란에 머물러 무크타다가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BBC는 시아파 10~15%에 이르는 강경세력이 알사드르를 따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아랍 민족주의 주창=무크타다는 이라크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웠다고 FT는 전했다. 또 이슬람교도 통합을 내세워 수니파에게도 협력을 제의했고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에 연대감을 표시했다.

민족주의는 종교는 같지만 인종이 다른 이란과 맞서는 요인이다. 무크타다 추종자들은 이란 시아파 최고성직자인 시스타니의 이란 말투를 비웃기까지 한다. 후세인이 사디크의 죽음을 시스타니와의 종파다툼 탓이었다고 선전한 것도 갈등 잠복요인이었다.

이라크 시아파 최고성직자로 온건성향의 알리 알시스타니와도 악연이 있다. 지난해 4월 무크타다의 일부 추종자들이 알시스타니 스승의 아들인 압델마제드 알코이를 살해했다. 무크타다 측은 알시스타니의 출국까지 요구해 극한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미군의 대응 미숙=미국은 과도통치위원회를 구성할 때 무크타다를 배제했다. 무크타다가 바그다드 함락 직후 병원과 무기 공장들을 접수하고 바그다드 및 남부지역을 분할해 성직자를 파견하는 등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한 실력자인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크타다 진영은 사원과 복지시설, 학교, 보건소 등을 운영해 주민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권위를 확보하는 한편 연합군과 보이지 않는 전선을 형성했다. 무크타다는 설교할 때 이라크에서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대목을 빼놓지 않았다.

1만여 명에 이르는 무크타다의 민병대는 초기 미군 주도의 현지 지휘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불가침조약까지 맺었다. 하지만 미군이 무크타다의 잡지를 정간시키고 측근까지 체포하며 공세로 나오자 본격적인 무장저항에 돌입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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