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러시아/"수백억원짜리 달걀 팝니다"

  • 입력 2004년 1월 29일 1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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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지만 가장 귀한 보석으로 알려진 시가 200억대의 '대관식 달걀(왼쪽)과 크렘린궁에 남은 10개 중 하나인 '파베르제 달걀'.
가장 작지만 가장 귀한 보석으로 알려진 시가 200억대의 '대관식 달걀(왼쪽)과 크렘린궁에 남은 10개 중 하나인 '파베르제 달걀'.
“무슨 달걀 하나가 수백억원이나 하지?”

최근 외신을 통해 옛 제정러시아 황실의 부활절 달걀이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 국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골동품 경매회사인 소더비가 4월 20, 21일 미국 뉴욕에서 부활절 달걀 9점을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는 것. 이 달걀의 주인은 경제 격주간지인 포브스를 내는 포브스 일가. 최근 경영이 어려워지자 180점의 공예품을 팔려고 내놓았다.

이 달걀들은 6∼7cm 길이로 실제 달걀보다 조금 큰 공예품. 그러나 값은 보석 못지않다. 이번 경매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대관식 달걀’은 1800만∼2400만달러(약 216억∼288억원)로 알려졌다. 러시아 보물 중에서도 ‘가장 작지만 가장 귀한 컬렉션’으로 꼽힌다.

러시아 황실의 달걀 공예품은 부활절에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선물로 주고받는 전통에서 탄생했다. 겨울이 긴 러시아에서는 부활절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인들은 4월 부활절을 즈음해서 추위에서 풀려나는 ‘또 다른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당대 최고의 보석세공과 금속공예의 명장(名匠)인 카를 파베르제다.

이번 경매에 나오는 달걀은 모두 그의 공방(工房)에서 나온 작품이다. 그는 1885년부터 30여년 동안 매년 부활절이면 달걀을 만들어 차르(황제)에게 바쳤다. 그의 작품 50점 중 현재 소재가 알려진 것은 42점. 이 달걀들은 한 점에 수백만달러씩 한다.

1897년에 만들어진 ‘대관식 달걀’을 보면 이 달걀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이유를 알 수 있다. 황금색으로 에나멜 칠을 한 모조 달걀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달걀을 열면 정교하게 만든 황금 마차가 들어 있다. 파베르제는 15개월 동안 하루 16시간씩 작업해 이 달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달걀은 달걀 자체의 화려한 장식뿐만 아니라 작은 달걀 속에서 나오는 액세서리의 정교함에 놀라게 한다. 그가 만든 최초의 달걀인 ‘암탉 달걀’(1855년)은 흰색 에나멜을 바른 모조 달걀 안을 황금으로 장식해 노른자처럼 만들고 병아리를 넣었다. 병아리 안에는 왕관이, 왕관 안에는 또 붉은색 달걀이 들어 있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면 기차나 마차 가마 심지어는 궁전이 달걀 안에서 나온다. 나중에는 기계장치로 움직임과 소리까지 냈다. ‘수탉 달걀’(1903년)은 매시 정각에 달걀이 열리고 수탉이 튀어나와 몸을 흔들며 소리를 내어 울도록 만들었다.

그는 부활절 아침까지 차르에게도 달걀 내용을 비밀로 했다. 차르는 매번 “이번에는 어떤 달걀로 놀라게 할까” 기대했다고 한다. 차르는 달걀을 받아서 황후나 모후에게 선물했다.

러시아 황실은 파베르제 공방에 ‘차르의 인증서’를 내리는 것으로 보답했다. 파베르제의 공방은 러시아 외에도 유럽 각국의 왕가와 귀족 가문에 공예품을 공급했고 한때 700명 이상의 예술가와 기술자가 일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방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에서는 10만점 이상의 공예품을 만들어냈다.

부활절 달걀은 조그만 크기에 담긴 극도의 사치스러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화(榮華)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자 파베르제 일가는 유럽으로 망명했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서방으로 탈출하면서 많은 예술품을 가져갔다. 이 때문에 파리 등의 골동품 상점에는 러시아 예술품이 넘쳐났다. 게다가 신생 소련 정부까지 재정난 때문에 예술품을 마구 팔아대는 바람에 국제 시장에서 값이 폭락했다. 파베르제 달걀도 1920년에는 3000달러에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파베르제 달걀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를 되찾았지만 파베르제가 스위스에서 죽은 후 달걀의 명맥은 끊어졌다.

50개의 달걀 중 현재 러시아 안에 있는 것은 크렘린에 있는 10개가 전부다. 영국왕실 컬렉션과 각국의 박물관뿐 아니라 포브스 가문처럼 개인이 소장한 경우도 많다.

파베르제 달걀은 시장에 나올 때마다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다. 소더비와 쌍벽을 이루는 크리스티도 지난해 11월 런던에서 러시아 예술품 경매를 열면서 파베르제 달걀을 200만∼300만달러에 내놓기도 했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의 미술전문기자인 타티야나 마르키나 기자는 “최근 파베르제 달걀에 대한 관심은 소련 붕괴 후 옛 러시아 제국에 대한 국내외의 향수(鄕愁)가 커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파베르제 달걀만이 러시아의 부활절 달걀은 아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골동품 가게에서는 200∼500달러면 멋진 달걀 공예품을 살 수 있고, 벼룩시장에는 50달러도 하지 않는 나무로 만든 달걀도 있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파베르제 달걀이 새 주인을 만나게 될 이번 부활절에도 많은 러시아인들은 그리스도교 성인(聖人)들이 그려진 소박한 달걀을 선물로 주고받을 것이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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