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바시 요이치 칼럼]美, 유엔창립 정신으로 돌아가야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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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 이라크인 정부를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건설을 맡긴다는 생각은 미국도 유엔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이 언제까지 계속 점령할 수는 없다. 양자간 차이는 수순이다.

미국은 헌법→선거→정부 순으로 진행하고 싶어 한다. 유엔은 정부→헌법→선거 순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친구와 함께 뉴욕에서 유엔안보리 이사국의 유엔대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와 같은 대립구도가 그려진다.

미국은 서둘러 이라크인 정부를 만든다 해도 치안이 나빠져 민주화가 늦춰질 것을 우려한다. 유엔은 이라크인 정부를 만들지 않는 한 점령군이 무엇을 하더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해 민주화가 멀어질 것을 걱정한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자주 “나는 유엔의 SG”라고 말한다. 사무총장(General Secretary)의 약자 ‘GS’가 아닌 희생양(ScapeGoat)에서 두 글자를 따서 하는 농담이다. 그는 “과도정권이 성립되지 않는 한 유엔은 정치적 역할을 맡을 계획이 없다”며 유엔 개입을 촉구하는 미국에 저항하고 있다.

유엔이 공식 인정 없이 미국 중심의 연합이 해오던 전후 처리를 맡았다가 일이 잘못되면 희생양이 될 것을 꺼리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 배경에는 지난번 바그다드 유엔사무소 폭탄테러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유엔의 ‘9·11’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의 험악한 관계는 이라크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라크전쟁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됐다고 하는 편이 옳다. 양자의 긴장은 세계 정치의 근본적인 구조변화 때문이다.

하나는 ‘파워’를 둘러싼 문제이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파워만이 기형적으로 팽창해 일극(一極)구조와 일극주의가 생겨났다. 그것은 대(對)테러전쟁과 이라크전쟁으로 더욱 명백해졌다. 다른 대국이 무더기로 덤벼도 미국을 당해낼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러시아는 상임이사국이 가진 거부권을 마지막 저항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 미국과 유엔, 둘로 수렴되어 가면서 유엔(정확히는 안보리)은 미국에 대한 유일한 견제세력이 되어가고 있다. 이라크전쟁 도중과 전후의 양자 대립은 이런 갈등이 드러난 것일 따름이다.

또 하나는 국가주권을 둘러싼 문제이다.

90년대 냉전이 끝나고 내전이 시작됐다. 종교와 민족분쟁, 테러, 대량살상무기 등 새로운 위협이 생겼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주권을 무시하면서까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생겼다. 보스니아, 코소보, 동티모르 등이 그렇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군사력 행사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또 국가건설에 있어서 군사력이 갖는 한계도 드러났다. 유엔의 관여와 역할이 더욱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생긴다.

국가주권을 제약하면서 개입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안보리고, 여기에 거부권을 갖는 것도 안보리 상임이사국(동시에 핵클럽 국가)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절대적 국가주권을 인정받고 있다. 다른 유엔 가맹국은 사실상 상대적 국가주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중기준의 모순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유엔, 그중에서도 안보리의 개혁이 시급하다. 그것도 아난 사무총장이 말한 ‘급진적’ 개혁이 아니면 때를 놓친다. 열쇠는 유엔 탄생의 아버지인 미국이다.

유엔의 탄생을 누구보다도 원했던 사람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대통령을 그만두고 초대 유엔사무총장이 되고 싶다”고 측근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유엔헌장 제정 회의를 2주일 앞두고 그는 서거했다. 뒷일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맡게 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연설 중에서 유엔헌장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힘을 하고 싶은 대로 사용해도 좋은 권리를 우리는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든 나라가 세계평화를 위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가다.”

미국이 이러한 원점에 다시 서는 것이 유엔 개혁의 전제이다.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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