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켈리의 비극

  • 입력 2003년 7월 2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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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영국 런던의 빅토리안 차링 크로스 호텔. 조용하고 진지하며 내향적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그 반대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듯한 또 다른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활달한 남자는 영국 BBC방송 국방담당 기자 앤드루 길리건.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라크 참전을 이끈 영국 정부가 과연 정당했는지 취재 중이었다. 이라크의 WMD 존재에 대해 데이비드 켈리 박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전문가는 없다. 걸프전 후 7년간 36번이나 이라크를 왕복하며 유엔 무기사찰단의 핵심으로 일한 인물이다. 그들 중 아무도 두 달 후의 비극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고 영국의 가디언지는 전했다.

▷과학과 국방, 치열한 정보전 사이에서 평생을 바친 켈리 박사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발단은 “총리실이 발표한 이라크 WMD 관련 문서가 더 그럴싸하게(sexier) 조작됐다”는 길리건 기자의 5월 29일 보도였다. 6월 1일 길리건 기자는 “취재원에 따르면 총리공보수석인 앨라스테어 캠벨이 ‘이라크는 45분 만에 WMD를 쏠 수 있다’는 내용을 집어넣도록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치열한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캠벨 수석은 부인한 반면 국방부가 취재원으로 발표한 켈리 박사는 청문회에 소환됐다. 청문회에서 의원들은 그를 ‘쓰레기’라고까지 비하했다.

▷영국 경찰은 켈리 박사가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지만 왜 죽음을 택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언론인 친구에게 “BBC방송 기자가 내 말을 잘못 해석한 것 같다”고 걱정했다는 그는 첫 청문회에서 “내가 유일한 취재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고, 두 번째 청문회에서는 ‘45분’과 ‘조작’ 보도는 추론에서 나온 것 같다며 한발 물러섰다. BBC는 켈리 박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그의 말을 잘못 전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지금 영국은 정치적 파워게임과 방송의 윤리성, 그리고 진실과 도덕의 문제를 놓고 뜨거운 공방에 휩싸여 있다. ‘손에 피를 묻힌’ 토니 블레어 총리는 물론 국방부 국회의원 BBC까지, 각자의 이익만을 좇는 추악함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격렬하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이라크에 WMD가 있는가의 여부이며,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해방’된 이라크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가이다. 죽기 전 지인에게 보낸 e메일에서 켈리 박사는 “일이 마무리되면 바그다드로 돌아가 할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이라크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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