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안병직교수 연구팀, 카뮈-모리아크 미완의논쟁 소개

  • 입력 2003년 6월 11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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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의 과거 청산 작업은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큼 엄격히 진행됐다는 게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은 13일 서울대 엔지니어하우스 대강당에서 ‘과거청산-국가별 사례와 쟁점’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독일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칠레 등의 과거 청산 사례가 발표되는 이 대회에서 특히 류진현(柳振顯·프랑스문학 전공) 서울대 강사의 ‘과거청산과 지식인:프랑스의 사례’라는 논문이 관심을 끌고 있다.

류씨는 미리 배포한 논문에서 광복 직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관심사였던 ‘전투(Combat)’지의 알베르 카뮈와 ‘르 피가로(Le Figaro)’지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프랑스 문단의 과거 청산 작업 역시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결국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음을 지적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카뮈는 ‘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개혁에 실패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엄격한 청산을 주장했다. 청산론 진영에는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에밀 앙리오 등이 참여했다.

이와 달리, 195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모리아크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작가들은 국민적 분열을 가져올 숙청의 범위를 가능한 한 축소하고 지식인에게 ‘오류를 범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용론은 숙청이 마치 제비뽑기 식으로 임의적인 처벌을 초래하는 데 대한 경계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장 폴랑은 ‘명백한 반역자’의 처벌은 인정하되 판단 착오에 의한 문인들의 오류는 용서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조르주 뒤아멜, 폴 레오토 등도 용서를 통한 신속한 화합의 옹호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마저도 빠른 속도로 그 열기를 잃게 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재건하는 문제가 시급한 해결과제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내홍의 양상을 띠게 된 책임 논쟁에 싫증을 내고 부역지식인 숙청에 실망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침묵과 화합을 희구하는 목소리가 청산론 진영에서도 나오기 시작했고 청산 작업은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번 학술대회는 안병직(安秉稷)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책임자로 있는 ‘역사와 기억’ 연구팀이 주최한다. 이 팀은 전임강사 이상의 공동연구원 11명 등 모두 69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팀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파시즘 군부독재 식민지배 등의 과거가 있는 각 나라의 청산 과정과 양상을 연구하고 있다.

안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프랑스의 과거 청산은 한편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소개됐다는 사실이 류씨의 논문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사 전공인 안 교수는 지난해 8월 15일 역사학회 학술대회에서 이른바 ‘친일’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과거청산방식을 비판했고 박찬승 충남대 교수, 이진모 한남대 교수는 각각 지난해 8월 31일자와 9월 14일자 모 일간지를 통해 안 교수의 견해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안 교수는 최근 역사학보 177집에 글을 발표해 “진정한 과거청산의 길은 ‘늦게 태어나 행운을 누리는 자’가 일방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불행한 체험의 당사자가 돼 함께 성찰하고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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