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신흥예술촌 첼시의 한국 화가들…고독풀어 꿈그린다

  • 입력 2003년 5월 25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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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예술인 거리 첼시에는 낮에는 건설현장 막일, 갤러리 전시 보조 등 각종 잡일로 돈을 벌고 밤에 작업을 하면서 스타를 꿈꾸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뉴욕 예술인 거리 첼시에는 낮에는 건설현장 막일, 갤러리 전시 보조 등 각종 잡일로 돈을 벌고 밤에 작업을 하면서 스타를 꿈꾸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뉴욕 맨해튼 북쪽 14번가에서 서쪽 32번가에 걸쳐 있는 ‘첼시’거리. 전통적으로 갤러리와 예술인들의 집합소로 알려진 소호(SOHO)에서 20여km 떨어진 첼시에는 5, 6년전부터 살인적인 임대료를 피해 작업 공간을 찾던 미술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소호가 점차 명품 브랜드들이 밀집한 ‘한국의 청담동’처럼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 때 탱크 공장과 70년대 자동차 공장들이 즐비했던 첼시거리는 오늘날 수많은 예술인들의 작업실과 유수의 화랑들이 즐비한 예술인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대개 10층 안팎의 콘크리트나 벽돌 건물이어서 외양만으로 거리의 실체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거리에 10m 간격으로 서 있는 돌기둥들이 백남준과 함께 작업했다는, 그 유명한 조지프 보이스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너무 평범하게 보여 누가 말해주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보통 한 빌딩에 평균 100여명의 아티스트들이 스무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고독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의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갤러리를 찾는 시민들로 붐벼 미술 인구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뉴욕=허문명기자

웨스트 26번가 골목에 서 있는 한 10층 건물도 그중 하나. 현관을 여니 유리 패널 안 대형 칠판에 입주자들 명단이 빼곡하다. 작가들만 200여명에 갤러리도 30여개가 들어선 건물이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설치 미술가로 미국 무대에서 알려진 재미 한국작가 마이클 주의 이름도 보인다. 만나보려 했지만 부재중이었다. 다른 한국 작가의 방을 찾아갔다.

갱 영화에서나 보았던 음산한 분위기의 철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로처럼 빽빽한 복도를 지나서 한국 이름이 적힌 문패가 달린 방문을 노크했다. 40대 초반의 한 한국 남자가 기자를 반겼다. 15평 작업실은 화구들과 집기들로 어지러웠다.

미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네 차례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는 그는 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이름을 밝히길 원치 않았다. 그는 본래 구상작업에서 출발했으나 뉴욕에 와서 추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2년 동안 뉴욕의 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교수들이 일일이 학생들 작업실을 찾아 다니며 조언하고 면담하는 교육방식을 통해 자신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작업방향까지 바꿨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 6년째다.

“뉴욕이요? 한 마디로 익사이팅과 다이내믹 그 자체지요.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거리의 쇼윈도만 봐도 작업에 도움이 됩니다. 한국은 작업 말고도 신경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여기선 남 눈치 안보고 내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요.”

마침 옆 건물에 작업실을 둔 또 다른 한국 화가가 방문했다. 대화는 이어졌다.

“가끔,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할까 지치기도 하고 학교 동기들이 한국에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을 보면 당장 보따리 싸고 싶은 생각도 들지요. 하지만 눈만 돌리면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업 공간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아요.”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전업 한국 작가들은 500여명. 이 중 성공한 작가로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된 백남준 외에 김수자, 강익중, 서도호, 마이클 주, 바이런 킴 등이 꼽힌다. 학맥보다는 철저한 시장논리에 따라 작품을 눈여겨 본 화상(畵商)이나 갤러리 사장들이 초대전을 마련하고 비평가들이 주목하는 방식으로 스타가 탄생하지만 세계의 젊은 작가들이 함께 경쟁하는 뉴욕에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크다. 두 화가는 말했다.

“최소한 집세와 작업실 임대료, 생활비를 합쳐 한 달에 3000달러(약 350만원)가 필요한데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지요.” “한국 작가뿐 아니라 뉴욕에 사는 무명의 많은 예술가들이 낮에는 건설현장 막일, 건물외벽 페이팅, 갤러리 전시보조 등 각종 일로 돈을 벌고 밤에 작업을 합니다.”

그래도 이들은 아직 이런 어려움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듯 했다.

“잘산다고 오만하지 않고 못 산다고 적의를 갖지 않는 게 이곳 사람들인 것 같아요. 1년에 한번 작업실 오프닝 행사를 하는데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생활비를 아껴서 그림을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지요. 변변한 식당도 없이 오로지 작가들의 작업실과 갤러리뿐인 이 거리가 주말이면 시민들의 여가 명소가 되는 것을 보면서 넓고 깊은 미술 인구의 저력을 실감합니다.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라도 내 일에 한번 승부를 내고싶은 욕망이 불끈 솟지요.”

뉴욕=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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