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바그다드]‘榮華’ 사라지고 후세인 초상화만 남아

  • 입력 2003년 4월 18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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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탱해온 집권 바트당 중앙당사는 바그다드 시내 국회의사당 옆에 서있다. 18일 9층 높이의 건물 앞엔 미군 전차 두 대가 삼엄하게 경계를 펴 적막감이 감돌았다. 바트당의 최고위층이 들락거렸던 당사도 다른 정부 청사들처럼 바그다드 사람들의 약탈 광풍을 피해가진 못했다.

미군은 당사 진입로에 장갑차를 배치하고 이라크인은 물론 기자들의 출입까지 봉쇄했다. 미 보병 3사단 로버트 볼 중사는 “4일 전 이곳에 왔을 때 이미 건물 안은 약탈로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며 건물을 에워싼 담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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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의 생일인 4월28일을 따 명명한 ‘4·28가(街)’에 있는 바트당 지구당 사무실. 상가 건물 2층의 방 7개가 바트당의 사무실로 쓰였다. 이 사무실은 인접 상가지역에 거주하는 시민 2000여명을 ‘관장’했다고 한다. 바트당 계선 조직 중 가장 주민에 밀착한 최하위 단위인 ‘페르카’가 바로 이것이다. 페르카 위에는 ‘샤아오바’와 ‘파라’가 차례로 층을 이루고 최상위에는 ‘알카에다 코트리에’로 불리는 지도부가 군림하며 주민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해왔다.

텅 빈 바트당 중앙당사에서 놀던 이라크 어린이가 18일 방치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사진을 들고 있다. -바그다드=이훈구특파원

‘4·28 페르카’ 지구당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붕괴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무실은 의자와 책상 등이 모두 약탈당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입구의 사무실 벽에는 이 페르카의 위계조직도, 행동강령 등이 쓸쓸히 붙어 있고 또 다른 사무실엔 여성 교육자료가 남아 나뒹굴고 있었다. 방에는 후세인의 초상화가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이곳의 중간 간부였던 칼리드 파룩(28)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100여명의 당원들은 모두 지방으로 피신했다”며 “바트당은 이제 끝났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했다. 공화국수비대원인 파룩씨 자신도 지방으로 도망갔다가 1주일 전에야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나머지 당원들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40년간 이라크를 주물렀던 바트당이 미군에 점령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바트당의 아랍 민족주의 이념마저 사라지는 걸까.

바트당의 공식 명칭은 바트 아랍 사회당. 1930년대 시리아에서 시작된 아랍 부흥운동에 뿌리를 뒀다. 영국 등 서구의 식민통치가 아랍정신을 말살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아랍의 유산을 지키고 강화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역설적으로 서구에서 교육받은 아랍 지식인들 사이에 퍼졌던 것이다.

바트 운동은 1940년대 들어 정치단체적 성격을 띠게 됐으며 공식적으로 1947년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정당이 생겨났다. 바트당의 이라크 지부는 1954년에 세워져 1963년 집권에 성공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영토를 내준 것은 아랍이 뭉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성이 널리 퍼지면서 바트당은 더욱 쉽게 서민층에 파고들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후세인은 당원에게는 각종 혜택을 준 반면 비(非)당파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박탈감에 빠진 국민의 불만이 커질수록 바트당은 오히려 통제를 강화해 어느덧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변해버렸다.

미군이 진주한 지금 바트당의 권력 공백을 누가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취재진이 묵고 있는 셰러턴호텔 바로 옆 피르두스(firdus·낙원) 광장. 후세인의 대형 동상이 서 있던 자리는 이제 시위대가 차지했다. 그들의 피켓에는 ‘이라크인의 손으로 이라크 정부를!’이란 구호가 요란하다.

광장 벽에 붙어 있는 것은 쿠르드족 지도자인 마수드 알 바르자니의 사진과 그의 활약상이 적힌 포스터. 미국이 과도정부 수반으로 점찍은 사람으로 알려진 아흐메드 찰라비, 바크르 알 하킴 등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찰라비씨가 이날 바그다드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부 군중은 “찰라비는 미국 첩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최근 찰라비씨가 미국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은 이 같은 민심을 읽은 때문일 것이다.

바그다드 시내 알리 알 살리트 지역에 있는 2층짜리 바트당 박물관. 약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후세인의 30여년 정치 이력이 담긴 사진 수십장이 깨진 액자에 담긴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먼지 속을 들춰 수십권의 방명록을 찾아냈다.

“위대한 역사 현장에 오게 돼 영광스럽다.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의 사료를 전시하고 관리하고 있는 박물관측이 고맙다”

1990년에 이곳을 찾은 방문객의 소감이다. 후세인의 ‘고난’은 바로 그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그때 방문객이 지금 다시 박물관을 찾는다면 어떤 생각에 사로잡힐까.

박물관에는 ‘새 주인’이 들어앉았다. 인근 빈민인 칼라프 하센(75)의 일가족 11명이 당장 잠자리가 없어 박물관에 밀고 들어온 것이다. 하센씨는 “부근에 살다가 집주인이 임대료를 너무 올려 쫓겨났다”며 “미군에게 허락을 받은 만큼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바트당 시절엔 꿈도 꿀 수 없는 발언이다. 이라크는 지금 무섭게 변하는 중이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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