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리더십 집중분석/중국]원칙 지키며 명분-실리 챙겨

  • 입력 2001년 8월 19일 18시 32분


《‘사상 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로 앞을 보고 나아가자.’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말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 개최에 앞서 열린 당 중앙공작회의에서 이런 제목의 연설을 했다. 4인방의 잘못된 사상으로부터 벗어나자, 실사구시가 판단의 기준이다, 일치단결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전체회의는 이 연설 직후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혁개방’ 결의를 채택했다.》

덩샤오핑의 연설은 이후 중국 공산당과 정부, 군 등 사회 전체의 지도원칙으로 자리잡았고 개혁개방 결의는 20년간 줄곧 추진됐으며 중국 경제는 대도약의 시기를 맞게 된다. ‘앞을 보고 나아가자(向前看)’는 구호는 개혁개방 정책이 강하게 추진되면서 ‘돈을 보고 나아가자(向錢看)’는 말로 바뀌기도 했다.

▼연재순서▼

- 미국
- 프랑스
- 러시아
- 중국
- 영국
- 일본

중국 정치의 특징에 대해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박건일(朴鍵一) 연구원은 “일단 원칙을 정한 다음에 정책을 결정하며 이후에는 일사불란하게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원칙을 중시하는 중국 정치의 특징은 대외정책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중국은 외교의 대원칙으로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부터 내려오는 △내정불간섭 △상호주권존중 △비동맹 등 이른바 ‘평화공존 5원칙’을 적용해 왔다. 중국은 다른 나라 내정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 우발적인 사건에도 이 같은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게 외교부 한 관리의 말이다.

4월 미중 정찰기 충돌사건이나 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건 처리도 그 같은 사례라는 것. 정찰기 충돌사고가 난 뒤 주방자오(朱邦造)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의 견해를 4가지로 정리했다. 사고지점은 중국 영해상이다, 미군 정찰기가 급선회한 탓에 사고가 생겼다, 중국은 사건을 조사할 권리가 있다, 미국은 사죄해야 한다는 것. 이후 정찰기가 해체돼 반환되기까지 약 100일간 양국관계는 꼬여갔지만 중국은 마지막까지도 이런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중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승무원 송환에 앞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중국에 사죄했다. 정찰기 반환 형식도 수리해 비행하겠다는 미국 주장 대신 해체 후 가져가라는 중국 주장대로 됐다.

99년 5월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은 즉각 이 사건이 ‘중국 주권을 침범한 횡포’라고 밝히고 군사교류와 인권협상 중단 등을 경고했다. 중국은 이후 미국으로부터 사죄와 동시에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박 연구원은 “중국이 원칙주의를 취하되 적용에 있어서 극히 유연하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영주권을 가진 중국계 학자 구속사건 처리는 이 같은 유연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 중국은 2월 가오잔(高瞻) 아메리칸대 교수를 간첩죄 혐의로 베이징(北京)에서 체포해 구속했다. 이어 리사오민(李少民) 등 일련의 미국계 학자들을 간첩죄로 체포하면서 이들 문제는 양국간의 민감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중국은 파월 국무장관의 방중에 앞서 재빨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마치고 간첩죄 등으로 10년형 등을 선고한 다음 즉시 병보석 신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석방해 미국으로 추방해버렸다. 원칙은 굽히지 않되 이를 유연하게 적용함으로써 양국 관계 개선의 걸림돌을 모양 좋게 제거한 것이다. 이처럼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유연하게 적용해 극단적인 외교마찰을 피하는 것이 중국 정부의 리더십 유형이라는 것이다.

주중 대사관의 한 관리는 이 같은 중국식 원칙주의 리더십을 한국이나 일본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례가 중국과의 농산물 분쟁. 한국은 국내 마늘재배 농가의 반발을 고려해 마늘 금수 조치를 취했다가 휴대전화 등 교역규모 면에서 100배나 큰 손실을 당한 다음에야 금수 조치를 바꿨다.

일본은 중국산 양파와 표고버섯 다다미용 왕골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른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조치를 발동했다가 중국으로부터 일본산 자동차 수입 금지란 보복을 당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국내 정치에 발목이 잡혀 이들 품목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하지 못해 갈수록 손실만 커지고 있다.

원칙도 없이 우왕좌왕하고 리더십도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한국 정치이기에 원칙 중심의 중국형 리더십이 더욱 돋보인다.

<베이징〓이종환특파원>ljhzip@donga.com

▼中사회과학원 쑨수린 교수 "상대가 수긍않는 원칙은 억지"▼

중국 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부소장 겸 당위원회 서기인 쑨수린(孫叔林) 교수는 “원칙주의가 현대 중국 정치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나라 덩치가 크고 일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아 사건이 발생하면 우선 원칙을 세워놓고 구체적인 해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어떻게 정해지나.

“크게 세 가지가 고려된다. 하나는 대국(大局)을 살피는 것이다. 아무리 바람직한 처방이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나중에 탈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또 하나는 미래를 보는 것이다. 장기적 안목에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하는 것이다. 상대가 수긍하지 않는 원칙이라면 억지가 되기 때문이다.”

-누가 원칙을 정하나.

“중국은 집중의 원칙이 있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원칙을 세운다. 가령 외교문제라면 당에는 당 대외연락부, 정부에는 외교부가 있다. 군이 관련되는 문제라면 군 관계자도 회의에 참여하며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에는 학자나 연구원도 참석하게 된다. 중요한 사안이라면 외교담당인 첸치천(錢其琛) 부총리가 관계기관이 모두 참석하는 외사공작위원회를 열어 의견을 모은 뒤 주룽지(朱鎔基) 총리 등 지도부의 재가를 얻어 원칙을 정한다.”

-한중간 마늘분쟁에서 보듯 한국의 경우에는 나중에 물러나더라도 일시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정책을 취하기도 하는데….

“마늘분쟁이 일어난 것은 한국이 협상을 제의하기 전에 먼저 방침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해버렸기 때문이다. 분쟁은 상대방이 있다. 당연히 먼저 협상을 제의하고 풀리지 않을 경우 분쟁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그는 “협상의 최종 잣대는 국익과 명분”이라며 “당시 협상을 먼저 시작했더라면 후유증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