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사태 분석]빈부갈등이 유혈시위 불렀다

  • 입력 2001년 5월 2일 18시 38분


필리핀의 유혈시위는 일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전대통령 조지프 에스트라다의 구속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 위기가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사태가 필리핀 사회의 뿌리 깊은 빈부 갈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국민의 약 30∼40%를 차지하는 극빈층은 에스트라다씨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에스트라다씨의 몰락이 나라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엘리트 계층이 권력 독점을 위해 그의 부패 혐의를 날조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은 에스트라다씨를 제외하곤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다.

1986년 시민혁명으로 축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대통령은 루손섬 북부의 명문가 출신이며 그의 부인 이멜다 역시 중부지역의 명문인 로무알데스가 출신. 시민혁명으로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전대통령도 필리핀의 대지주 가문인 코후앙코가 출신이며 그의 후계자인 피델 라모스 전대통령 또한 마르코스의 친척이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 역시 60년대 중반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거둔 아키노 대통령은 경제엔 무능했고 라모스 대통령은 규제완화와 공기업 민영화 등으로 경제난 해결에 공헌했지만 빈민 문제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학교를 중도 포기한 3류 배우 출신에다 숱한 염문을 뿌리는 등 도덕적으로도 깨끗하지 못했던 에스트라다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이같은 족벌정치에 대한 필리핀 국민의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보통 사람’을 선거 구호로 내세우고 대통령에 당선된 에스트라다씨에 대한 빈민층의 기대는 대단했다. 마닐라의 슬럼가인 톤도 출신인데다 영화배우 시절에 악랄한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적(義賊) 역할을 자주 맡았던 그는 빈민의 영웅이었다. 그는 산후안 시장 시절(1968∼86년)에도 학교와 병원 건립 등 사회복지에 힘을 쏟았고 이후 상원의원과 부통령을 지낼 때에도 빈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 라모스 전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의 기득권층은 그를 가리켜 ‘국가의 재앙’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한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에스트라다씨가 부정부패 혐의로 1월 권좌에서 쫓겨나고 아로요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필리핀의 경제는 회복은커녕 더욱더 침체의 골로 빠져들면서 빈민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이번 유혈 시위는 에스트라다씨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평생 헤어날 길 없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대한 빈민층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로요 대통령이 빈부 격차와 갈등을 줄이지 못하는 한 에스트라다씨의 수감을 빌미로 한 유혈 사태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필리핀 대학의 랜디 데이비드 교수(정치학)는 “이번 시위 참가자들은 몰락한 에스트라다씨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분노와 불행, 그리고 절망을 목도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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