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LA리포트]'사면게이트'에 미국정국 출렁

  • 입력 2001년 2월 28일 18시 31분


근대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과학의 발전입니다. 그리고 과학은 자연현상를 관찰하여 법칙을 찾아내고 이 지식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예측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카오스이론, 나비효과이론 등이 보여주듯이 최근 들어 사회현상 뿐 아니라 자연현상을 포함한 세상사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惡材속출 민주당 망연자실▼

그러나 한국정치에 관한 한, 이같은 새로운 사고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즉 3김이 자주 선문답처럼 내뱉어온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는 말이 바로 이같은 사고를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생물과 같아서 언제 어떤 변수가 터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워낙 돌발변수가 많고 예측불가능한 것이 한국정치라는 점에서 이같은 정치=생물론 이 한국 정계에서 나온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최근의 사태는 정치의 경기규칙이 짜여져 있고 예측 가능성이 높은 미국정치에서도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유권자 투표에서의 패배, 개표과정에서 있었던 무효표 시비, 이를 둘러싼 여러 인권, 사회단체들의 선거결과 불인정 시위, 민주당의 저항 등으로 인해 원래의 입장에서 크게 후퇴한 중도적인 정책들을 제시하고 나서지 않는 한 집권 초기부터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편 민주당은 정통성에 결함이 있는 부시 대통령의 입성에 전의를 다졌습니다. 특히 전직대통령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연방 상원에 진출한 힐러리 클린턴, 그리고 백악관을 벗어나 행동이 자유로워진 클린턴 전대통령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빠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일각에서는 4년 뒤 힐러리 상원의원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만들자는 설익은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클린턴 전대통령은 자신의 최측근이자 민주당 최고의 돈줄인 테리 멕컬리프를 민주당 당의장 자리에 앉힘으로서 퇴임 후에도 민주당에 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클린턴이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날 서명하고 나온 사면조치를 둘러싼 사면스캔들이라는 예상치 않은 변수가 터져 나오면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클린턴 전대통령이 유대계 거액 탈세도주범 마크 리치를 사면한 것이 문제가 돼 시작된 이번 스캔들은 힐러리 상원의원의 남동생인 휴 로덤 변호사의 사면청탁 금품수수, 클린턴의 이복동생 로저의 사면청탁, 힐러리의 선거재정 책임자의 사면청탁, 유태계의 힐러리 선거지지를 위한 유태계 횡령사범 사면거래설 등 끝을 모른 채 눈덩이처럼 터져만 가고 있고 현지 언론들은 이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매일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처럼 발전하자 민주당은 망연자실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고 부시대통령 진영은 때아닌 호재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클린턴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앨 고어 전부통령 역시 대선 패배 후 초야로 돌아감에 따라 가뜩이나 구심점을 갖지 못해온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의 감세안 등 미국의 장래를 결정할 주요 안건들을 둘러싼 일대결전을 앞두고 이같은 초대형 악재가 터져 나옴에 따라 대응전략을 세우지 못한 채 한숨만 내쉬고 있습니다.

▼공화당 강경보수정책 '순풍'▼

특히 이 문제가 섹스스캔들에 이어 다시 한번 특별검사에 의한 조사로 이어질 경우 사건의 장기화에 따른 여파는 상당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고민은 크기만 합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이같은 민주당의 수세국면을 이용해 이라크 공습 재개, 말썽 많은 국가미사일방어(NMD)체계 추진 선언 등 발빠르게 강경 보수노선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클린턴의 엉뚱한 악수로 세계를 좌우할 주요정책들이 제대로 된 논의나 별다른 반대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은 섹스스캔들로 미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클린턴 피로증을 극복하기 위해 고전한 바 있습니다. 이제 클린턴은 떠났지만 민주당, 나아가 미국정치는 클린턴 피로증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즉 클린턴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강대 교수·현 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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