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한국기업/下]'만만디 덫' 걸려 잇따라 철수

  • 입력 2000년 12월 21일 18시 33분


중국 베이징(北京)시 차오양(朝陽)구 쿤룬호텔 주변에는 주중대사관을 비롯해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기관이 밀집해 늘 한국인으로 붐빈다. 이곳에는 불고기집 ‘설악산’, 한정식집 ‘비원’, 일식집 ‘송도’, 광둥식요리점 ‘해화성’ 등 한국인이 투자한 음식점이 20개에 달한다. 이곳에 올해 7월 한식집 ‘아성원’이 문을 열었으나 6개월 만에 간판을 내렸다. 건물이 갑자기 헐리게 된 것이다. 주인 L씨는 다른 곳에서 ‘한성관’이란 식당을 열어 많은 손님을 끌었다. 하지만 장사가 본 궤도에 오를 무렵 건물주가 계약을 파기하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요구해 큰 손해를 보았다. 소송을 통해서도 제대로 결말을 보지 못한 판에 또 다시 비슷한 일을 당한 것.

▼"믿을것은 계약서뿐" 강조▼

이곳에서 4년째 음식점을 하는 P씨는 “중국에서 돈 벌기란 정말로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지난 여름 베이징 시당국은 느닷없이 한국업소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였다. 한국인 주인이나 주방장을 불법취업자로 몰아붙여 이를 무마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주중한국대사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중국진출 기업에 대해 “믿을 것은 계약서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끼리 만나 몇 년을 이곳에서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동안 ‘수업료’ 많이 냈겠네요.” ‘수업료’란 사업을 벌이면서 떼이거나 엉뚱한 일로 날려버린 돈.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인 모임인 한국상회의 임수영회장은 “중국을 잘 모르고 들어온 기업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말했다. 상관행이 정착되지 않은 데다 이해하지 못할 제약요인이 많기 때문이다.

▼법제도등 미비 보호 못받아▼

베이징 교외에서 6, 7년간 통신용 케이블을 생산해온 D통신은 최근 고심 끝에 철수결정을 내렸다. 대금회수를 둘러싼 거래선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고급건재와 가구를 생산해온 S기업도 얼마 전 사장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가파치’ 브랜드로 중국진출을 시도했던 P피혁도 금융위기 때 직원을 철수시킨 상태다.

중국은 법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투자를 하고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4년 전 베이징 교외 창핑(昌平)현에 500만위안(약 7억원)을 들여 공장부지를 매입한 S전기는 아직 건물을 짓지 못하고 있다. 상급기관이 토지사용계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베이징에서 최근 PC방 사업을 시작한 S사도 공안당국이 딴죽을 거는 바람에 1호점 조차 문을 못열어 투자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한국기업도 중복투자와 과당경쟁, 엉성한 인맥관리 등 문제가 많다. 의사소통이 편하다는 이유로 조선족 동포를 중간간부나 직원으로 쓰는 수가 많은 데 이들과 마찰이 심각한 경우도 있다. 지난 봄 상하이(上海)와 톈진(天津)에서는 하대에 불만을 품은 조선족 직원이 한국인 사장 가족을 납치해 살해하기도 했다.

▼국내업자 과당경쟁도 문제▼

현지 실정을 무시한 경영도 문제. 모 기업 간부는 “중국 시장에서의 싸움보다 한국 본사와의 싸움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현시 사정을 모르는 본사 경영진이 일을 꼬이게 만드는 수가 많다는 것.

모토로라는 중국 현지화에 성공한 사례. 이 회사는 제품연구개발, 인맥관리 전략 등을 현지인 책임자가 결정하고 본사는 장기간 실적평가만 한다. 한국 기업은 LG 포항제철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지화 개념조차 없다는 것이 중국에 진출한 한 기업 실무자의 자평이다.

<베이징〓이종환특파원>ljh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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